리산드로 알론소-<유레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영화가 있다. 영화의 모든 것이 멈춘 이후에도 계속될 것만 같은, 그래서 극장에 불이 켜진 이후에도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마지막 구두점을 향해 나아가면서 그 마침표를 어떻게 찍을지를 기대하게 만들 때 아주 간혹 영화의 구두점을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찍으며 그 뒤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를 남겨두고 멈추는 듯한, 그 후의 모든 가능성을 나에게 넘긴 이후 떠나는 것만 같은 영화를 만나는 때가 있다. 내게 있어 리산드로 알론소의 <유레카>는 바로 그런 영화이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그리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영화.
<유레카>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리산드로 알론소의 전작 <도원경>을 떠올렸을 것이다. <도원경>의 후반부. 드넓은 평원에 홀로 남은 군나르가 영화 바깥에서 그에게 물어오는 질문에 대답한다. “모르겠어.” 그렇게 디제시스의 안과 밖이 만난 후 영화는 갑자기 시공간을 현대로 옮겨온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가 만나는 순간. 그 순간 이전까지 진행되던 영화의 서사는 이제 또 다른 차원의 세계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로서 남아있게 된다. 세계와 세계의 만남.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도원경>의 초반은 누가 보더라도 서부극의 방법론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영화가 전개될수록 서부극의 서사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것은 영화가 식민주의자들의 서사인 서부극을 거부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고유한 영토를 화면 위로 드러내는 과정이다. 식민주의자들의 시선을 거부하는 영화. 그러면서 이전까지 영화에 부여되었던 단일한 시선 체계는 무너지고 우리의 인식 체계 바깥에서 찾아온 신비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럴 때 비로소 군나르의 이야기는 서부극의 단일한 서사에서 벗어나 딸을 찾아 나선 아버지의 이야기로 탈바꿈하며 새롭게 시작한다. 리산드로 알론소의 포스트 식민주의적 방법론. 서구 열강으로부터 강제된 이야기가 아닌 세계 속에 던져진 인간의 이야기. 그렇게 군나르의 이야기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현재의 세계로 환원되어 생명을 부여받는다. 현재의 자리에서 과거를 복원하여 미래로 개방하기. 우리는 <리버풀>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남긴 채 영화 바깥으로 떠난 패럴을 보았다. <유레카>는 그러한 이야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더 멀리 나아간 작품처럼 보인다.
영화는 서부극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 서부의 한 마을로 찾아온 카우보이 머피(이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는 <도원경>에서 군나르를 연기했던 비고 모텐슨이다). 이때 영화는 흑백으로 진행되고 4:3의 좁은 화면비로 진행된다. 이상한 선택. 화면 안에는 수많은 미장센들이 프레임을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리산드로 알론소는 가장 좁은 화면비인 아카데미 비율로 영화를 진행한다. 그렇게 서사가 절정에 이를 무렵 갑자기 장면이 현대의 tv속 화면으로 전환되고 무대는 현대로 바뀐다. 우리가 <도원경>에서 목격한 순간. 하지만 <유레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현대의 미국에서 살아가는 인디언 경찰과 소녀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 앞서 보았던 서부극과 달리 경찰과 소녀의 서사에는 드라마가 없다. 경찰의 서사는 그저 여러 범죄자들을 만나는 것의 연속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어떠한 스펙터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물의 피로하고 권태로운 얼굴만이 보일 뿐이다. 게다가 이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화면은 2.35:1의 넓은 화면비로 진행된다. 이전의 서부극은 좁은 화면비가 너무 많은 것이 담겨있던 것에 반해 경찰의 서사는 공허하고 황량한 풍경을 너무 넓은 화면비로 담아낸다. 이 차이의 핵심은 무엇인가? 머피의 서부극에서는 보아야 할 것이 많음에도 우리의 시선은 좁은 화면으로 인해 제약된다.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말할 것도 없이 서부극의 시선. 이 서사의 시선은 일말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은 채 정확한 논리와 규칙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화면 안의 수많은 미장센 안에서도 머피의 서사에만 얽매이게 된다. 가능성이 차단된 서사. 그 서사는 현재로 넘어와서 tv안에 갇히게 된다. 반면 경찰의 서사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화면의 여백 자체이다. 이 넓은 화면에는 이상하리만큼 아무것도 없다. 화면에서 유일하게 볼만한 경찰의 얼굴은 이러한 여백을 견디는 얼굴이다. 공허한 세계. 그 세계는 왜 그녀에게 공허한가? 여기는 미국이다. 그곳에는 인디언인 그녀를 위한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로지 무전을 통해 전해지는 명령을 통해서만 움직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화면의 여백을 채울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그 공허한 여백을 홀로 견뎌야 한다. 다시 한번. 여기는 미국이다. 백인의 나라. 백인의 명령. 그 명령을 따라 이동하던 중 한 사건 현장에 도착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이 휘날리는 창문 밖을 바라본다. 그녀의 서사는 거기서 끝난다. 이것은 실패도, 패배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닌 필연적 한계를 마주한 뒤 그 세계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저항일지도 모른다.
경찰의 서사가 끝난 뒤 그녀와 함께 살던 인디언 소녀의 서사가 이어진다.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찾아가 전사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준 차를 마신 뒤 새로 변한다. 리산드로 알론소는 여기서 한 번 더 서사의 변곡점을 만들어낸다. 새로 변한 소녀는 과거로 날아가 자신의 조상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다. 이때 화면은 다시 아카데미 비율로 돌아온다. 그녀는 과거 선조들이 백인들로부터 겪은 착취와 고통을 목격한다. 역사의 시선. 정해져 있는 서사. 하지만 그 서사가 진행되던 중 한 남자가 그 안에서 탈주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그 남자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남자의 서사가 한창 고조될 무렵 리산드로 알론소는 영화를 끝낸다. 마치 경찰의 서사가 그러했듯이. 그들의 서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 변한 소녀가 남자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건너온 전사이다. 그것은 곧 백인이 승리했다는 선언에 대한 반대증명이자 백인의 서사에 대한 저항의 표식이다. 이제 그들은 백인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서사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펼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그것은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리산드로 알론소는 잘 알고 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관객인 우리의 몫이다. 닫히지 않은 미래.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유레카>는 극장의 불이 켜진 이후에도 나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상영 중인 영화이다. 나는 <유레카>가 나에게 남긴 무한한 가능성이 주는 황홀함을 계속 만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