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카즈오-<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 <미나마타 만다라>
하라 카즈오의 두 편의 다큐멘터리,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과 <미나마타 만다라>는 시작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누구든지 두 편의 러닝 타임 앞에서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시간 35분의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 그리고 6시간 12분의 <미나마타 만다라>(그 사이에 위치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건너뛸 예정이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것은 영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다. 거대한 세월 앞에 선 카메라. 그 세월 앞에 다가서기 위한 시간. 단지 세월이라고 묘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세월 안에는 함부로 묘사할 수 없는 피해자들의 거대한 고통이 응축되어 있다. 고통의 시간. 억압의 시간. 분노의 시간. 인고의 시간. 그 모든 시간이 응축되어 있는 세월의 거대함. 그 심연에 들어서기 위해서 영화의 기나긴 러닝 타임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렇기에 이 두 편의 영화는 관객인 우리에게 함께 견딜 것을 요구한다. 견디는 영화. 단순히 물리적 시간이 아닌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것.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고통의 세월에 다가서기 위한 영화와 관객의 사투.
하라 카즈오는 21세기 들어 한동안 다큐멘터리를 찍지 않았다. 20세기에 <극사적 에로스>와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와 같은 작품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마치 숨을 고르듯이 21세기에는 <치카의 여러 얼굴>이라는 극영화 외에는 특별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2016년 러닝타임 3시간 35분의 거대한 호흡을 지닌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을 발표했다. 뒤이어 2019년에는 4시간 8분의 <레이와 시대의 반란>을 완성했고 2020년에는 6시간 12분의 <미나마타 만다라>를 완성했다. 하라 카즈오의 영화는 점점 더 길어졌다. 그의 데뷔작인 <극사적 에로스>는 1시간 35분이었고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는 2시간 2분이었다. 이 물리적 차이는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영화의 형식 자체만 놓고 본다면 영화들 사이에는 큰 변화가 없다. 하라 카즈오는 언제나 피사체가 되는 대상을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영화의 형식 자체보다 피사체가 되는 대상이 무엇이냐의 차이에 있다. 그의 초기작인 <극사적 에로스>와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는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들이다. 급진 페미니스트 다케다 미유키를 기록한 <극사적 에로스>. 아나키스트 오쿠자키 겐조의 행적을 따라가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하지만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과 <미나마타 만다라>는 특정 인물이 아닌 사건 자체를 따라가는 영화이다. 두 영화에서는 특정 인물이 아닌 거대한 사건 그 자체, 좀 더 정확히는 사건의 희생자 전체가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인물에서 사건으로. 개인에서 집단으로. 그렇기에 개인보다 거대한 집단과 사건을 담아내고자 하는 영화들은 필연적으로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물리적 길이는 하라 카즈오 본인의 의지가 아닌 피사체가 내린 결정일지도 모른다.
이제 두 영화 사이의 차이를 알아보자.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은 오사카 센난 지역에서 석면으로 인해 신체적, 경제적 피해를 입은 공장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석면의 위험성을 알고도 묵인하고 방치했던 정부를 상대로 피해 배상 소송을 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미나마타 만다라>는 일본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서 화학 공장이 무단 방류한 메틸수은으로 인해 발병한 미나마타병 환자들이 병의 존재를 묵인하고 배상을 거부하던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적 투쟁을 이어나가는 과정에 대한 영화이다. 정부는 피해자들을 상대로 관료주의적인 태도 하에서 형식적인 사과만을 반복하고 피해 보상에 대해서는 유예하기에 급급한 태도를 보인다. 피해자들은 그런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을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소재와 서사만을 보면 두 영화는 유사점을 지닌다. 그러나 두 영화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에서는 세 번의 소송이 등장한다. 피해자 모임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배상 소송은 지방 법원과 고등 법원, 그리고 대법원에 걸쳐서 총 세 번의 소송이 진행된다. 소송에서 승소한 뒤 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완벽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피해 배상을 받으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미나마타 만다라>는 어떠한가? 영화의 초반부, 미나마타병 피해자들은 소송에서 승소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이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소송의 연속. 투쟁의 연속. 왜 이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는가? 그것은 투쟁의 주체가 조금씩 바뀌기 때문이다. 정부는 끊임없이 제대로 된 사과를 유예하고 그러면서 극히 일부의 피해자만을 피해 보상 대상자로 선정한다. 그 과정에서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한 또 다른 피해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사과와 배상을 받기 위한 또 다른 소송을 이어나간다. 유예의 연속. 배제의 연속. 유예라는 전략은 곧 시간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선택이다. 정부와 싸우는 것은 개인의 집합체이지만 이들이 싸우는 정부는 특정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닌 국가 권력이라는 추상적 관념 그 자체이다. 국가라는 관념. 권력이라는 관념. 이러한 추상적 관념으로 무장한 정부는 피해자들의 육체가 시간 앞에서 마모되어 모두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듯이 사과의 순간을 유예하기를 반복한다. 피해자들의 투쟁은 곧 그러한 시간 앞에서 물러나지 않기 위한 투쟁이다. 인고의 시간. 분노와 투쟁의 시간. <미나마타 만다라>는 그러한 시간에 더 자세히 다가가기 위해 투쟁의 과정만이 아닌 투쟁을 이어나가는 이들의 삶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고자 한다. 하라 카즈오는 영화의 중간중간 미나마타병 환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들의 내밀한 삶, 연애와 결혼, 심지어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이건 단순히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한 명의 인간으로서 대우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하라 카즈오가 진정으로 담아내고 싶은 것은 이들의 삶, 그 삶이 내포한 세월 그 자체이다. 카메라 앞에 있는 육체, 그 육체가 간직한 기억, 그 기억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세월. 그것은 곧 이들의 투쟁이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예의 반복. 연장되는 투쟁의 시간. 하염없이 길어지는 시간 안에서 이들의 투쟁은 하나의 특정한 사건이 아닌 이들의 삶 그 자체가 된다.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이 투쟁 자체를 찍은 영화라면, <미나마타 만다라>는 투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 자체를 찍은 영화이다. 투쟁이라는 사건. 투쟁을 체화한 삶이라는 사건.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법한 얼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센난 석면 피해 배상 소송>의 후반부. 대법원에서의 판결이 승소로 끝났지만 일부 피해자들은 1972년 이후에 일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배상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미요코 사토의 남편 역시 그중 한 명이다. 판결이 있고 다음날, 미요코 사토는 길거리에서 자신의 사연을 읍소하듯이 털어놓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남편은 석면 노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녀가 소송에 참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돈 때문에 소송을 하느냐는 남편의 질문에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고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소송에 참여했다고 이야기한다. 하라 카즈오는 길거리에서 탄식하고 절규하는 미요코 사토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오랫동안 지켜본다. 이 얼굴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전에도 영화 속에서 연설하는 인물을 바라보는 장면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연설은 명확한 대상을 향한 연설이고 연설하는 자의 얼굴은 한 개인의 얼굴이 아닌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대변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미요코 사토의 연설은 누구를 향한 연설인지 명확하지 않다. 거기다 그녀의 연설은 피해자들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고통과 사연을 담은 연설이다. 즉 이 연설은 미요코 사토라는 한 명의 개인이 세상을 향해 호소하고 절규하는 모습이다. 누구도 듣지 않는 목소리. 개인의 목소리는 집단의 목소리에 비해 한없이 나약하다. 그 모습을 하라 카즈오의 카메라는 끝까지 지켜본다. 세상이 그녀를 외면하더라도 영화는 그녀를 외면하면 안 된다. 영화의 의무. 카메라의 윤리. 하라 카즈오는 피해자들 전체의 투쟁을 담으면서도 그 안에 내재한 개인의 고유한 사연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얼굴. <미나마타 만다라>에서 간사이 소송의 원고 대표인 토시유키 가와카미는 간사이 소송 8주년 모임에서 “개인은 절대 국가를 상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절대로 개인은 국가를 법정에 데려가서는 안 됩니다.”라는 발언을 한다. 당황스러운 순간. 그 오랜 시간을 국가와의 투쟁을 위해 살아온 사람에게서 나온 모순적인 말. 이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 기나긴 세월을 투쟁한 자의 거대한 권태와 피로, 그리고 근심이 담겨 있다. 어떤 근심? 국가라는 거대 권력과의 투쟁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의 발언에는 그간 이어온 기나긴 투쟁에 대한 피로함만이 아닌 이 투쟁이 자신의 대에서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 역시 투영되어 있다. 그것을 알기에 토시유키 가와카미는 노년의 몸을 이끌고 다시 한번 소송에 참여한다. 끝나지 않을 이야기.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러나 끝나야만 하는 이야기. 어쩌면 이것은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영화는 멈추었다. 하라 카즈오의 카메라도 멈추었다. 그러나 이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멈추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