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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un 23. 2024

걷는 자와 뛰는 자, 혹은 풀려난 자와 갇혀 있는 자

왕빙-<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왕빙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단순히 그의 몇몇 대표작들이 보여주는 엄청난 러닝타임 때문만은 아니다. 왕빙의 영화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라는 사회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왕빙이 자신의 영화에 담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기억, 혹은 하나의 사건 자체를 넘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질문과 성찰이다. 20세기 이후 근현대사에서 중국이 이뤄낸 거대한 발전, 그러나 그 이면에 숨어있는 상처들. 왕빙은 그 상처를 마주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그 시공간을 찾아가는 감독이다. 때때로 왕빙은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 역시 인물의 개별적인 삶 자체를 넘어 그 삶에 내재되어 있는 중국의 역사 자체를 담아내기 위한 방법의 일부이다. 개인의 삶과 특정한 시공간에 녹아있는 역사의 잔해. 그것은 때로는 거대한 철거의 현장이기도 하고(<철서구>), 국가가 숨기고자 하는 역사이기도 하며(<사령혼>), 중국이라는 국가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청춘(봄)>). 그렇기에 왕빙의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라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중국이라는 국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가 왕빙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섣부르고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왕빙의 영화를 볼 때면 종종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어떤 시적인 순간이 존재한다. 그 순간은 왕빙이 그러한 순간을 연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왕빙의 카메라가 피사체를 대하는 과정 자체에서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섬뜩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기도 하며, 때로는 기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자리에서는 바로 그러한 순간을 선사한 장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는 중국 원난성에 위치한 한 정신병원에서 진행되는 영화이다. 이 병원에 들어오는 순간 수용자들은 외부 세계와 철저하게 분리되고 고립된다. 수용자들 중에는 범죄자들도 있으나 어떤 이들은 억울한 이유로 병원에 수감되기도 한다. 왕빙의 카메라는 병원에 수감된 다양한 인물들은 따라가며 영화를 진행한다. 수많은 인물들을 담아내는 장면들 사이에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내 눈길을 사로잡은 두 장면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장면. 영화의 초반부, 병원에 수감된 지 5개월 된 마 지안이라는 인물을 카메라가 따라간다. 그러던 중 갑자기 마 지안은 복도에서 달리기 시작한다. 건물 복도는 네모난 형태로 순환하는 구조이기에 인물은 달리면서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 지안이 달리기 시작하자 카메라 역시 그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마 지안의 뒷모습을 찍으며 함께 뛰던 카메라는 그가 달리는 것을 멈출 때까지 함께 달린다. 누구든지 이 장면을 보고 난 후 서늘함을 느꼈을 것이다. 마 지안은 왜 달리는가? 그는 이 공간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달리기는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이 공간과 시스템에 대한 최선의 저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의 운동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달리기를 카메라가 찍을 때 마 지안은 마치 카메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달리는 것만 같다. 물론 왕빙의 카메라는 피사체를 끝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그를 따라간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했을 때 마 지안은 어떤 식으로든 카메라에게서 도망치고자 했을 것이다. 어째서? 카메라에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여전히 그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단순히 관찰의 시선이 아닌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부조리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다. 그 부조리가 남아있는 한 왕빙은 카메라를 들어야 하고 마 지안은 찍힐 수밖에 없다. 찍어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은 찍힐 수밖에 없다는 절망으로 귀결된다.


또 하나의 장면. 한 남자가 11년 만에 병원에서 풀려나 외부로 나오게 된다(이 남자의 이름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자막으로 나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뒤 그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카메라 역시 그를 따라다닌다. 그러다가 남자는 어디론가를 향해 끊임없이 걷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도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고 답할 뿐이다. 그렇게 계속 걷던 남자는 밤이 되어서도 계속 걷고 있다. 물론 그 사이의 시간적 단절이 있었을 테지만 왕빙은 이를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낮부터 밤까지 계속 걷기만 한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 역시 그의 뒷모습을 찍으며 따라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카메라가 걸음을 멈추더니 화면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 장면이 끝난다. 이 장면에서 왕빙은 처음으로 피사체를 놓친다. 혹은 카메라의 시선에서 놓아준다. 이것이 남자의 마지막 장면이다. 누구나 이 장면을 본 직후 이전에 보았던 마 지안의 달리기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두 장면의 차이점. 마 지안은 뛰고 남자는 걷는다. 마 지안을 찍는 카메라는 그를 끝까지 따라가지만 남자를 찍는 카메라는 어느 순간 따라가는 것을 멈춘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마 지안은 병원에 갇혀 있고 남자는 풀려났다. 병원이라는 공간. 외부라는 세계. 이 차이는 단순히 공간의 차이를 넘어 실존을 둘러싼 세계의 문제이다. 마 지안이 수감되어 있는 병원이라는 공간은 확고하고도 부조리한 시스템을 통해 존재하는 세계이다. 모든 환자들은 철저하게 환자로서만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이 세계는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세계이다. 반면 남자가 병원에서 나와 마주한 세계는 어떤 것도 규정되지 않은 세계이다. 그는 병원에서 나와 환자의 신분에서는 벗어났지만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철저한 실존의 문제이다. 그때 남자가 마주한 세계는 관념론적인 세계가 된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은 명백하게 남자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메타포이다. 삶이라는 문제. 왕빙은 그러한 관념론적 세계가 카메라에 담기자 곧바로 물러선다. 그것은 그의 영화가 찍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찍을 수 없는 것이다. 왕빙은 한 개인의 삶 자체가 아닌 하나의 시공간, 더 나아가 국가와 역사 자체를 찍고자 하는 감독이다. 영화가 찍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왕빙은 침묵하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영화가 해야 할 일이다. 왕빙은 한 인터뷰에서 왜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에서 계속 영화를 만드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자 “나는 영화감독입니다. 내가 찍어야 할 대상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영화의 윤리. 더 나아가 영화의 의무. 하나의 정언명령. 찍어야 하는 것이 거기 있는 한 찍어야 한다. 아마도 중국이 있는 한 왕빙의 영화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선택을 넘어 우리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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