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민재 Oct 16.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뷰

화해불가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영화를 먼저 감상하신 후 읽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나는 총살에 관여할 때 군중이나 여자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참혹함과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나 국가 보안본부의 명령에 의한 인질 처형이나 집단적 총살에는 진절머리가 나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희생자들도 최후의 순간까지 친절하게 돌보아줄 수도 있겠고 해서 나로서는 마음이 편했다."-루돌프 회스의 회고


1. 영화가 끝난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방금 나와 눈이 마주쳤던 저 인물, 루돌프 회스, 마치 프레임 바깥을 응시하는 듯한, 내러티브를 초월하여 영화 바깥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던 그 인물, 혹은 그를 연기한 크리스티안 프리델이라는 배우는 지금 자신이 영화 속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물론 영화 속 인물이 스크린 밖에 있는 우리와 눈을 마주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이 말을 잘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단순히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 스크린 너머에 있는 관객과 눈을 마주친다는 행위. <네 멋대로 해라>에서의 진 세버그. <살인의 추억>에서의 송강호. <퍼스널 쇼퍼>에서의 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리고 내가 놓친 수많은 영화들. 물론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루돌프 회스는 다른 인물들처럼 바로 앞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멀리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루돌프 회스의 모습은 어떤 깨달음 이후 영화 바깥을 욕망하는 응시처럼 느껴진다. 어떤 깨달음? 너무 늦은 깨달음, 실현될 수 없는 깨달음, 역사의 흐름 앞에서 조용히 묻힐 깨달음, 혹은 영화 안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를 깨달음. 게다가 이후 조용히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알 수 없는 체념까지 느껴진다. 무슨 체념?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체념. 그래서 지옥의 어둠을 향해 내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체념.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지금 매우 위험하면서도 역겨울 수도 있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을. 나치의 장교,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말살했던 그 인간에게 어떻게 구원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는가?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구원은 영적인 의미나 종교적인 의미의 구원이 아니다. 루돌프 회스가 악마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 나치라는 거대한 악을 위해 복무하지 않았을 가능성. 그래서 선량하고도 평범한 인간으로 존재했을 가능성. 그 모든 가능성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정당한 것만 같다.


이 마지막 장면이 유독 잊히지 않는 것은 조나단 글레이저의 전작 <언더 더 스킨>의 마지막 장면이 중첩되기 때문이다. <언더 더 스킨>의 마지막 장면. 외계인 로라가 한 남자에게 숲 속에서 강간을 당한다. 그러다가 인간의 모습을 한 그녀의 외피가 벗겨지더니 외계인인 그녀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남자가 그녀에게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그녀를 죽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쇼트. 카메라가 하늘을 향해 틸트 업을 하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카메라 렌즈에 묻는다. 그러면서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제까지 스크린 위에서 펼쳐진 모든 서사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 허구성은 로라의 실패와 영화의 실패에 대한 폭로이기도 하다. 어떤 실패? 로라의 실패는 완전한 타자의 자리에 있던 인간의 자리에 다가서고자 한 욕망의 실패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유혹과 사냥의 대상에 불과했던 인간은 이제 로라에게 있어 그녀의 욕망을 움직이는 대타자의 자리로 옮겨간다. 그러나 라캉이 조언했듯이 대타자와의 합일은 언제나 실패한다. 욕망의 대상으로 변한 인간의 자리를 향한 로라의 욕망 역시 실패한다. 이 로라의 실패를 바라보며 조나단 글레이저는 그녀를 따라가던 영화의 실패를 함께 선언한다. 어째서? <언더 더 스킨>에서 로라가 수행한 일은 사실상 영화가 하는 일과 동일하다. 로라가 남자를 유혹하여 사냥하듯이 영화는 피사체를 스크린으로 유혹하여 프레임 안에 가둔 뒤 피사체를 잡아먹을 수 있다. 그것이 곧 영화의 힘이고 폭력이다. 영화는 마음만 먹으면 프레임 안의 피사체를 원하는 대로 변형하고 매만지며 (로라가 하듯이) 폭력적으로 다룰 수 있다. 그랬던 영화가 피사체와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가고자 할 때, 더 이상 변용의 대상이 아닌 관찰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이 될 때, 피사체는 영화의 대타자가 된다. 바로 그 대타자를 탐구하며 완전한 합일을 꿈꾸는 것이 영화의 욕망이다.


그러나 로라가 실패하듯이, 피사체를 향한 영화의 욕망 역시 필연적으로 실패를 향할 수밖에 없다. 이때 영화의 실패는 그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실패가 될 것이고 실재와 세계와의 합일을 꿈꾸던 영화 예술의 실패이다. <언더 더 스킨>의 마지막 쇼트는 바로 그러한 실패를 드러내면서 영화와 세계 사이의 간극, 영화와 관객 사이의 간극, 그리고 영화와 피사체 사이의 절대적 간극을 드러낸다. 그리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마지막 장면 역시 그러한 타자와의 간극을 폭로하며 끝난다. 물론 루돌프 회스는 로라가 아니다. 그는 픽션의 인물이 아닌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언더 더 스킨>과 마찬가지로 끝내 극복할 수 없는 타자와의 절대적 거리를 보여주는 영화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정반대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피사체와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영화가 아닌 오히려 피사체를 어떠한 훼손도 없이 프레임 안에 박제하려는 영화처럼 보인다.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아닌 간극 자체를 박제하는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미학적 목표는 루돌프 회스를 박제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영화의 형식과 미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 역시 거기서 출발할 생각이다. 먼저 화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화면 대부분은 마치 미술관에 전시된 미술 작품처럼 보인다. 단순히 화면의 미장센이 미술적인 것을 넘어 쇼트 자체가 운동을 멈춘 채 정지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영화의 어디에도 쇼트의 역동성과 활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화면 속의 공간은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인위성이 느껴진다. 인공적인 세계. 인간이 창조한 천국. 카메라 역시 대부분의 장면에서 고정되어 있고 움직일 때 역시 트래킹 쇼트 이외에 패닝이나 틸트 등의 움직임은 없다. 거기다 영화 어디에도 시점 쇼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카메라의 역할은 오로지 관찰하는 것이 전부이다. 정적인 이미지. 역동성을 잃은 쇼트. 이때 이미지가 정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건 슬로우 시네마의 문제가 아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다 보면 화면이 정적이고 느린 것을 넘어 쇼트 자체가 운동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운동하지 않는 쇼트. 다르게 말하자면, 몽타주 하지 않는 쇼트. 변증법을 거부하는 영화. 물론 변증법을 거부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영화가 이미지의 변증법을 거부할 때 이미지는 몽타주라는 충돌의 운동을 통한 의미 생성을 멈추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쇼트와 쇼트의 상호작용이 아닌 이미지 자체의 내재적 기의를 통해서 의미의 관계망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곧 몽타주라는 운동이 충돌을 통해 생성한 새로운 형태의 의미가 아니라 이미지 자체에 녹아있는 우리의 지식, 경험, 통념, 그리고 가치관 등이 이미지의 표면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미술적인 영화인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영화에서 쇼트를 충돌시키는 대신 쇼트와 이미지를 전시한다. 미술적인 쇼트. 운동이 금지된 쇼트. 왜 그래야 하는가? 단순한 이유. 조나단 글레이저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의미생산의 과잉이다. 이 영화의 이미지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이미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의 정반합을 생산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카메라 앞에 있는 인물들,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어떠한 타인의 가능성도 용납되지 않는다. 나치의 부역자, 홀로코스트의 집행자 중 한 사람으로서 루돌프 회스는 오로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스티븐 히스는 영화에서 프레임의 역할은 곧 화면의 과잉을 방지하고 경계를 구분 지으며 영화 내부의 에너지를 봉쇄하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미술적이고도 인공적인 프레임은 루돌프 회스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의미의 과잉을 차단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에게는 어떠한 다른 운동, 그에게 타인의 가능성을 선사할 수 있는 쇼트의 운동은 허락되지 않는다. 악마는 악마로 남아있어야 한다.


물론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조나단 글레이저는 그의 악행을 직접 스크린에 전시하면서 그의 악마성을 묘사하지 않는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전략은 정반대이다. 그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루돌프 회스를 그에게 걸맞은 이미지가 아닌 낯설고 이질적인 이미지에 위치시킨다. 여기에 악마의 이미지는 없다. 영화 속 루돌프 회스는 다정하고 가정적인 아버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 자신의 애마를 아끼는 주인, 유능하고 열정적인 조직의 일원의 이미지 안에서 살고 있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 이미지는 허락되어서는 안 되는 이미지이다. 불가능한 이미지. 이것은 재현의 방법론적 문제가 아닌 윤리의 문제이다. 그들은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이미지가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재현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우리가 그 이미지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진정으로 충돌하는 것은 쇼트와 쇼트가 아닌 이미지와 우리의 의식이다. 허락되지 않는 이미지. 허락하지 않는 의식. 하나의 충돌. 그러나 이것은 변증법적 운동이 아니다. 이 충돌 이후에는 어떠한 형태의 새로운 테제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도, 영화를 만든 조나단 글레이저도 원하지 않는다. 어떠한 생성도 없는 고통스러운 충돌의 연속. 충돌 그 자체가 목적인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관람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악을 평범하게 찍은 영화”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관한 어떤 의구심은 여기서 비롯된다. 분명하게 이 영화에서 조나단 글레이저가 시도한 재현의 방법론과 미학적 시도는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구분된 방법이기에 담론의 대상이 될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나 그 방법론 끝에 마주하는 것이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에 대한 새로운 방법의 감각과 사유로 이어지는 대신 이미 우리의 통념적 사고의 재인으로 회귀한다면 그 방법론의 의미는 무엇인가? 혹시 그 재인의 과정에서 영화 속 인물들과 관객인 우리 사이의 도덕적 거리감은 더 확고해지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조나단 글레이저 본인 역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루돌프 회스의 탄식만이 아니라 조나단 글레이저의 망연자실함 역시 느껴진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조나단 글레이저는 우리에게 선언한다. 그들과 우리, 나치의 부역자들과 우리, 영화 속 그들과 영화를 보는 우리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누구라도 화해의 손을 내미는 순간 역사의 저편에서 그들의 만행 아래 사라진 수많은 희생자들의 메아리가 들려올 것이다. 우리의 죄의식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메시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 마디로 대답하고 싶다. 화해불가.



3. 영화는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화면. 그 안에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사운드. 무언가 불길하고 불결하게 들리는 사운드. 마치 악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사운드. 그 불길한 사운드는 곧 평화로운 새소리로 바뀐다. 이윽고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강가에서 평온하게 물놀이를 즐기는 루돌프 회스 가족의 모습이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사운드와 이미지를 충돌시킨다. 불길하고 기괴한 사운드. 평화롭고 회화적인 이미지. 부조화의 순간. 만일 당신이 이 영화의 사전적인 정보를 전혀 모른 채 영화를 관람하더라도 이 첫 장면이 나오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혹여나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얼마 안 가 영화는 이들의 정체를 알려준다. 오프닝에서 평화롭게 휴가를 즐기는 가족. 이들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그저 조금 부유한 상류층 가족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비춰진다.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이다. 날이 밝자 루돌프 회스의 두 아들이 회스의 눈을 가리고 집 앞마당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수건을 풀었을 때 회스의 앞에는 가족들이 그의 생일 선물로 준비한 카누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뻐할 수 없다. 단순히 영화가 이를 건조하게 찍었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루돌프 회스가 입고 있는 옷. 나치 친위대의 장교복. 이 순간부터 우리는 이것이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루돌프 회스는 가족들의 선물에 행복해하며 자신의 막내 아기를 카누에 앉힌다. 그리고는 다시 아기를 아내 헤트비히에게 넘긴다. 가정부가 아이들에게 학교 갈 준비를 하라며 재촉한다. 그리고 다음 쇼트. 아이들과 아내가 빠져나가자 그 자리에 카메라가 자리한다. 그 구도에서 비로소 우리는 담벼락 너머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를 발견한다. 망연자실한 순간. 그 순간부터 우리는 앞서 바라보았던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싶을 것이다. 이 쇼트가 더 소름 돋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영화에서 처음 아우슈비츠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쇼트가 있는 자리는 곧 루돌프 회스의 가족,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눈에 비극의 장소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코 무고하지 않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학살의 집행자인 루돌프 회스 본인만이 아니라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모방하며 이득을 취한 가족 역시 악인의 자리에 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가족들 역시 그것을 숨길 생각이 없다. 헤트비히는 아우슈비츠 수용자들 중 한 명의 옷으로 보이는 모피 코트를 입고 거울을 바라본다. 이 옷의 주인은 지금 바로 코앞에 있는 또 다른 세계, 그녀의 남편이 관장하고 있는 지옥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모피 코트를 걸친 채 거울을 바라볼 때 그녀는 그 옷의 원래 주인, 지금 집 바로 앞에 있는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을 유대인의 자리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유대인은 인간의 자리에 있지 않다. 응접실에서 이웃 여자들과 담소를 나눌 때도 그녀들은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은 옷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는다면, 그녀들이 이야기하는 옷들의 원래 주인에 대해서 상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역사의 원죄 의식. 그때 그들과 지금 우리 사이의 거대한 간극. 루돌프 회스의 아이들은 어떠한가? 아들 클라우스는 아버지를 따라 나치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다니며 아우슈비츠로 호송되는 유대인들을 보았다. 한스는 집 안에서 사과를 두고 싸워 처형되는 유대인의 모습을 보았다. 거기다 클라우스는 마치 유대인을 가스실에 집어넣듯이 동생 한스를 온실에 가두는 장난을 친다. 아이들은 지금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모르지 않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 코 앞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총소리, 소각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처럼 악을 집행하거나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다루는 루돌프 회스의 태도이다.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루돌프 회스는 가족들이 선물한 카누를 타고 아들 한스와 딸 잉에를 데리고 강가에 놀러 온다. 한스와 잉에는 강변에서 놀고 회스는 강 한가운데서 낚시를 한다. 그러다가 물속에서 무언가 그의 발을 건드리자 깜짝 놀란 회스가 그것을 물 밖으로 꺼낸다. 사람의 뼛조각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한 뒤 그는 허겁지겁 아이들에게 달려와 집으로 데려간 뒤 목욕을 시킨다. 그는 무엇을 본 것인가? 유대인의 뼈. 재가 되지 않은 뼈. 미처 소멸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증언하는 망령의 흔적. 그 유령을 마주한 학살자는 그 흔적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루돌프 회스가 소망하는 세계는 완벽하게 통제된 세계이다. 더 정확하게, 회스와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과 매일 유대인들이 죽어가는 아우슈비츠는 같은 공간에 있을지 언정 완전히 분리된 세계로 있어야만 한다. 두 세계 사이에는 완전한 단절이 존재해야 한다. 이건 단순히 순수한 게르만인과 유대인 사이의 분리가 아니다. 루돌프 회스는 지금 집 앞에 있는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아이들이 모르기를 바란다. 그는 수용소에 끌려가고 자신들을 위해 강제노역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숨길 생각은 없지만 수용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가스실에서 죽어나가는 유대인들과 소각되어 재가 되는 시체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아이들로부터 숨긴다. 아마도 그것이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와 아버지 루돌프 회스의 차이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루돌프 회스가 소망하는 세계는 곧 미술적인 세계이다. 어째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는다. 루돌프 회스에게, 그리고 그의 아내 헤트비히에게 있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완벽한 유토피아이다. 이 유토피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러티브와 몽타주의 운동을 통해 변화가 생성되는 영화적 세계가 아닌 특정한 시공간이 화폭 안에 박제된 미술적 세계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집을 바로 앞에 있는 수용소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천국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들은 완벽하고 무결한 자신들의 현재를 박제하면서 영원을 얻고자 한다. 이것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미술적인 방식으로 찍힌 또 하나의 이유이다. 이 영화의 형식은 조나단 글레이저뿐만이 아니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루돌프 회스로부터도 기인한 것이다. 운동하지 않는 세계. 박제된 현재성. 반문. 왜 루돌프 회스는 유대인과의 철저한 분리를 원했음에도 수용소 바로 앞에 집을 지었는가? 대답은 단순하다. 그것이 루돌프 회스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아버지 루돌프 회스의 일. 루돌프 회스를 아버지로 만드는 것.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가족들 앞에 보여줌으로써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굳건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아버지 루돌프 회스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회스가 함께 있어야만 한다.


또 하나의 반문. 수용소 바로 앞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는 것이 가능한가? 집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총소리, 소각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보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아이들은 매일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지 않는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에게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것이 아이들의 역할이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척하기.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척하기. 그렇게 의도적으로 장님이 되고 농인이 되어야 천국은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여기는 미술의 세계가 아닌 영화의 세계이다. 루돌프 회스는 자신이 영화 속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미술 속 인물이 되기를 욕망한다. 미술과 영화의 차이. 미술에서 관찰자는 자신 앞에 펼쳐진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을 필요가 없다. 그 앞에서 무엇을 그릴지는 오로지 관찰자의 몫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카메라는 그럴 수 없다.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자가 누구이든 카메라는 자신 앞에 펼쳐진 풍경을 있는 그대로 렌즈 안에 담아낸다. 그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루돌프 회스가 화폭에서 지우고 싶어 하는 흔적들, 역사의 흔적, 실재의 흔적, 유령의 흔적,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결국 보이는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아우성 칠 것이다. 카메라의 프레임은 미술의 화폭이 아니다. 루돌프 회스를 바라보는 것이 영화인 이상, 그 영화를 우리가 보고 있는 이상 그가 욕망하는 천국은 실재할 수 없다. 인공적인 천국과 실재하는 지옥. 화해불가.


4. 영화에서 가장 섬뜩하고도 동시에 아름다운 장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해가 저물어가는 저녁, 루돌프 회스가 정원에서 시가 담배를 피운 뒤 집으로 들어온다. 집에 들어온 그는 모든 방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불을 끈다. 영화는 불이 꺼진 뒤 하나씩 어둠에 잠겨가는 집을 지독할 정도로 세세하고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다가 2층 복도 불을 끄다가 자신의 딸 잉에가 자지 않고 복도에 앉아 문밖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한다. 루돌프 회스가 뭐 하냐고 묻자 잉에는 설탕을 나눠준다고 대답한다. 누구에게 나눠주냐는 질문에 찾고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딸을 방으로 데리고 가 잠을 재운다. 그리고 다음 장면. 갑자기 화면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질감으로 바뀐다. 카메라는 열화상 카메라로 바뀐 뒤 어둠 속에서 땅 속에 사과를 꽃아 두는 소녀를 찍는다. 그러는 동안 화면에서는 기괴한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마치 괴물의 울음소리, 혹은 유령의 비명처럼 들리는 소리. 또 한 편에서 루돌프 회스는 자신의 두 딸에게 헨젤과 그레텔 동화를 읽어준다.


누구든지 이 장면을 보자마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해석을 하고자 할 것이다. 잠을 자지 않다가 잠에 드는 딸과 잠을 자지 않고 사과를 나눠주는 소녀. 헨젤과 그레텔의 빵 부스러기와 소녀의 사과. 전혀 다른 질감의 두 화면. 혹시 열화상 카메라 속 소녀는 루돌프 회스의 딸 잉에일까? 혹은 이 장면은 잉에의 꿈일까? 수많은 가능성. 어떻게든 연결 짓고 싶게 만드는 표상들. 만약 열화상 카메라 속 소녀가 잉에라면 우리는 잉에가 지닌 타인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아버지를 거부하는 딸. 나치의 딸임에도 유대인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는 소녀의 헌신. 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 번째 장면. 지하실에서 올라온 루돌프 회스는 잉에가 또다시 자지 않고 창고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조용히 딸을 안고 방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다시 등장하는 열화상 카메라와 기괴한 사운드. 소녀는 수용소 이곳저곳에 사과를 퍼트려 놓는다. 할 일을 마친 뒤 소녀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소녀는 잉에가 아닌 폴란드 소녀이다. 그리고 이것은 잉에의 꿈이 아닌 실재이다.


영화의 제작 과정에 대해 찾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열화상 카메라 속 폴란드 소녀는 실존 인물이다. 알렉산드라 비스트론코워지에이치크. 그녀는 실제로 12살 때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강제 노역지에 사과를 남겨두며 굶주린 유대인들에게 작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때 핵심은 무엇인가? 이 장면을 보는 동안 우리가 표상을 연결하고 의미를 만들고자 했던 모든 노력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다. 열화상 카메라 속 소녀와 잉에 사이에는 어떠한 상호작용도 있을 수 없다. 그 둘을 연결시키는 순간 그것은 역사에 대한 모욕이자 이 소녀의 저항 정신에 대한 모욕이다. 잉에의 세계와 알렉산드라의 세계. 두 세계는 함께 있지만 함께 있을 수 없다. 알렉산드라는 잉에가 아니다. 알렉산드라의 저항은 잉에의 꿈이 아니다. 알렉산드라의 사과는 잉에의 설탕도, 헨젤과 그레텔의 부스러기도 아니다. 역사의 장벽. 불가능의 메타포. 잉에의 아버지 루돌프 회스가 불을 끄며 세상을 어둠에 잠기도록 할 때 알렉산드라는 그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스스로 빛을 낸다. 잉에가 잠을 자지 않고 방 밖에 나와있을 때 어째서인지 그녀는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몽유병은 무엇인가? 몸은 깨어있는데 정신은 잠든 상태.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몸이 잠 들 시간에도 저항을 향한 정신의 힘으로 움직인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의도적으로 잉에의 몽유병과 알렉산드라의 저항 운동 사이에 수많은 은유 가능성을 보여주다가 그 은유가 결국 실패하는 광경을 보여주며 역사의 거대한 간극을 더 명확하게 보여준다. 다시 한번. 이 영화에 몽타주는 없다. 새롭게 생성되는 의미 같은 것도 없다. 불가능한 메타포. 잉에는 알렉산드라가 될 수 없다. 잉에는 영원히 나치의 장교, 아우슈비츠의 소장 루돌프 회스의 딸로 남을 것이다.


두 번째로 사과를 나눠주고 집에 온 뒤 알렉산드라는 갑자기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 장면이 진행될 때 화면의 질감과 톤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루돌프 회스의 집을 찍을 때는 인공적이면서 미술적인 느낌이 들었던 화면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톤으로 바뀐다. 게다가 피아노를 치는 알렉산드라를 열화상 카메라가 아닌 일반 카메라로 바라본다. 피아노를 치는 그녀의 뒤에서는 햇살이 비추고 있다. 그녀가 연주하는 곡은 요제프 불프의 <햇빛>이라는 곡이다. 요제프 불프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수용소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 이 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햇살은 따스하게 퍼지고 우리의 몸은 젊고 늙었네. 비록 우리 몸은 여기 갇혔으되 그 마음만은 식지 않았네. 영혼은 태양처럼 강렬히 불타올라 고통을 찢고 날아오르네. 우리 곧 보게 되리. 나부끼는 깃발을. 아직 오지 않은 자유의 깃발을.”(영화 자막 참고)


루돌프 회스와 알렉산드라의 차이점. 루돌프 회스가 박제된 현재성을 욕망한다면 알렉산드라는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머지않아 도래할 미래의 현재성을 소망한다. 그렇기에 루돌프 회스는 어떠한 변화도 오지 않는 미술적인 세계를 욕망하고 알렉산드라는 도래할 미래를 향해 운동하는 영화적 세계를 소망한다. 그 미래가 현재가 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알렉산드라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어둠 속이 아닌 햇살 아래에서. 알렉산드라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에서 그녀가 치는 피아노는 실제 알렉산드라의 피아노이며 그 집 또한 실제 알렉산드라의 집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마치 역사의 실재 안에 픽션이 잠시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실존 인물인 알렉산드라는 이미 2016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쩌면 이 장면은 이미 세상을 떠난 알렉산드라가 12살 시절의 육체를 빌려 우리 앞에 잠시 다녀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5. 출발점으로 돌아오자. 내 질문이 시작된 지점. 영화의 마지막 장면. 우선 이 마지막 장면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자. 루돌프 회스는 상부로부터 조직 구조 개편에 의한 전출 명령을 받는다. 그는 아내에게 아우슈비츠를 떠나야 한다고 고백한다. 루돌프 회스와 헤트비히는 강가에서 강물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헤트비히는 아우슈비츠 옆에 있는 집에서 떠날 생각이 없다. “여긴 우리 집이야. 그동안 꿈꿔 왔던 삶이잖아. 17살부터 꿈만 꿨던 삶을 마침내 이뤘어. 도시에서 벗어나 원하는 것 모두 맘껏 누리면서 애들도 건강하고 다들 행복해 해. 총통께서 역설하던 모범적인 삶이잖아. 동쪽으로 가서 보금자리를 찾는 것. 그렇게 찾은 보금자리인데.” 보금자리. 헤트비히의 꿈. 모든 것이 완벽한 집. 하지만 헤트비히는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는다. 그녀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녀는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다. 어째서? 그녀에게는 이 완벽한 집, 남편은 최고의 권력자로 있고 아이들도 행복하며 정원에서 식물을 가꿀 수 있는 집만이 관심 대상이다. 헤트비히에게, 더 나아가 독일인에게 아우슈비츠의 자리는 없다. 그것은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 눈에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천국과도 같았던 세계가 흔들린다. 무엇에 의해? 상부의 명령. 아우슈비츠 최고의 권력자인 루돌프 회스를 능가하는 권력의 명령. 권력으로 유지되던 세계는 더 큰 권력에 의해 흔들린다. 하지만 헤트비히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 결국 그녀와 아이들은 집에 남고 루돌프 회스 홀로 집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영화의 내러티브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유일하게 서사에 영향을 끼치는 사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는 몇 가지 사건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서사에도, 루돌프 회스의 세계에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헤트비히 어머니의 방문도, 어둠 속에서 사과를 남기고 가는 알렉산드라도, 루돌프 회스가 가족 몰래 행한 유대인 여성과의 성매매도 그저 사건으로 남을 뿐 어떠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권력으로 유지되는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더 큰 권력이 필요하다.


루돌프 회스는 그 명령을 따라 아우슈비츠를 떠나 베를린으로 온다. 하지만 작별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상부는 루돌프 회스를 다시 아우슈비츠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떠나기 전 그는 나치의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한 파티에 참여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든다. 파티가 끝난 후 루돌프 회스는 밤늦게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파티에 누가 왔었냐는 헤트비히의 질문에 루돌프 회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세히 안 봤어. 거기 와 있는 사람들. 가스로 몰살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지 그거 생각하느라. 근데 실행은 어렵겠더라. 천장이 높아서.” 베를린에 있으면서도 아우슈비츠만을 생각하는 루돌프 회스. 다시 완벽하게 미술적인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생각만을 하는 권력자.


전화를 끊은 뒤 그는 방을 나와 건물 계단을 내려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에 이상을 느끼더니 헛구역질을 한다. 다시 계단을 내려온 뒤에도 다시 헛구역질을 반복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자마자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을 떠올렸을 것이다. 악인의 헛구역질. 아무것도 비워내지 못하는 실존의 몸부림. 루돌프 회스는 무엇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일까?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죄의식? 자신보다 더 거대한 권력에 순종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깨달음? 아니면 곧 도래할 패배의 역사에 대한 불안? 수많은 해석. 수많은 가능성. 그렇게 몸부림치는 루돌프 회스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반대편 복도로 건너간다. 우리는 이전 쇼트에서 그 너머에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 갑자기 루돌프 회스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이 카메라를 바라본다. 이어지는 장면. 현재의 아우슈비츠 박물관. 박물관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건물을 청소하며 비극의 현장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과거. 루돌프 회스는 멀리서 카메라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더니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한 어둠에 잠긴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한 가지 가정. 만약 루돌프 회스가 그 장면들, 현대의 아우슈비츠를 찍은 장면을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 장면의 연결은 우리에게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지만 루돌프 회스에게는 현재와 미래의 연결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본 미래. 그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의 아우슈비츠에서는 비극의 역사가 보존되는 중이다. 여기서 ‘비극’과 ‘역사’ 중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루돌프 회스는 이미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비극의 현장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일이 거대한 비극이 되어 보존되는 패배의 역사이다. 그는 비극이 아닌 패배를 볼 것이다. 그는 어떠한 참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세계와 자신이 믿고 따르는 나치의 세계가 얼마 안 가 무너진다는 사실에 탄식할 것이다. 절대적 간극. 비극을 추모하는 자와 패배를 탄식하는 자.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와 영화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루돌프 회스 사이에는 극복 불가능한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을 만드는 것이 바로 영화의 역할이다. 루돌프 회스가 꿈꾸던 세계, 미술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 완벽한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 수많은 이미지의 연쇄. 조나단 글레이저는 마치 영화 속 루돌프 회스에게 그가 미술의 세계가 아닌 영화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것만 같다. 그 순간 영화의 스크린은 루돌프 회스에게 감옥이 된다. 벗어날 수 없는 경계. 설령 그가 영화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영화 바깥을 욕망한다고 한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영화의 안과 밖을 이어주는 교두보가 아니라 그 경계를 더욱 확고히 하는 장벽이다. 역사는 이미 흘러갔다. 그는 타인이 될 수 없다. 악마는 영원히 악마로 남을 것이다. 그의 헛구역질은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한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과거와 현재의 이미지를 오가며 발생한 몽타주의 운동 역시 실패한다. 어떠한 변화도, 어떠한 지양도 없는 운동. 오로지 거대한 간극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루돌프 회스는 체념하듯이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역사의 흐름에 순종하듯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듯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계단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그는 완전한 어둠을 향해, 지옥의 저 아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의 가족과 부하들이 그를 반길 것이다. 비극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루돌프 회스는 1947년 4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이것이 역사이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히 악마로 남을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화해불가.


"나의 양심은 나로 하여금 다음 선언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감방의 고독 속에서 나는 인류에게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쓰라린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사령관으로서 나는 인간 파괴를 위한 '제3제국'의 잔인한 계획의 일부를 수행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인류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혔습니다. 나는 특히 폴란드 국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 목숨으로 갚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언젠가 제가 한 일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폴란드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폴란드 감옥에서 나는 인간의 친절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인도적 대우를 경험했고, 그것이 나를 깊이 부끄럽게 했습니다."-루돌프 회스가 처형되기 4일 전 전한 메시지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은 낙엽을 타고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