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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Aug 16. 2023

영웅을 기억하는 법

구로사와 아키라-<이키루>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존 포드의 영화가 떠오른다. 동시대 서로 다른 환경에서 활동한 위대한 이름들. 그들은 영화를 찍는 것이 자본의 문제라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고 그 논리에 따라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장르의 영화를 찍었다. 존 포드의 서부극.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 두 장르는 엄연히 다른 시공간을 토대로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강력한 기시감을 지울 수가 없다. 두 장르의 공통점. 존 포드의 서부극과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는 모두 영웅과 공동체의 관계를 다룬다. 존 포드의 영화에서 서부의 사나이는 공동체를 위해 영웅이 되지만 그 공동체의 위험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오는 순간 스스로 공동체를 떠난다. 그건 이상화된 공동체에는 더 이상 서부의 영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 앞에서 사라지는 영웅. <수색자>에서 문명을 등지고 서부의 황량한 대지로 떠나는 존 웨인의 뒷모습을 떠올려보자. 비단 서부극뿐만이 아니라 비서부극에서 역시 존 포드는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한다(가장 대표적으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와 <분노의 포도>).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영화에서 미후네 토시로로 대표되는 사무라이들은 공동체를 위해 영웅이 되지만 공동체의 위협이 사라지면 자신 역시 사라진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모든 전투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뒤 시마다가 탄식하듯이 말한다. “이 전쟁에서 이긴 건 우리들이 아니라 백성들이다.” 그들은 승리해도 승리하지 못한다. 무엇이 이들을 역사 바깥으로 밀어내는가? 이들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그들이 지켜낸 공동체로부터 애도받지 못한다. 물론 이들은 애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윤리대로 행동하고 그들 스스로 공동체로부터 물러나기에 애도에 실패하더라도 유령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 회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면서도 동시에 역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도록 한다. 그렇기에 영웅은 실패한다. 정확히 말하면 영웅으로서 기억되는 것에 실패한다. 더 이상 공동체는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기억할 필요도 없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그러한 영웅의 실패와 허무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들이 역사 앞에서 기억될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저항처럼 보인다.


<이키루>는 그러한 기억에 관한 영화이다. 영웅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영웅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주인공 와타나베는 시청에서 관료주의에 물든 생활을 이어가던 도중 시한부를 선고받는다. 야스퍼스가 말한 한계상황을 마주하는 자. 와타나베는 그러한 실존적 한계를 두 가지 방식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하나는 말 그대로 현재의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것. 육체의 쾌락에 몰두하는 삶. 영화는 쾌락을 찾아 밤거리를 배회하는 와타나베의 늙은 육체를 생생하게 따라간다. 그때의 육체는 분명 생경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 찰나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 찰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껏 자신이 지켜온 가장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 시청 공무원의 자리에 대한 윤리를 모두 버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찰나에는 섬광처럼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지언정 그가 사라진 후에 그의 존재는 세계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것을 깨달은 와타나베는 또 다른 방법을 택한다. 쾌락에서 윤리로. 찰나에서 영원으로. 그는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불만을 제기해 온 하수도 문제를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에 담기지 못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 안에서 현재화되지 못한다. 그가 진정한 공무원으로서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장면의 다음 쇼트는 그의 장례식이다. 그의 행적은 오로지 그를 지켜봐 온 부하 직원들의 증언과 기억이 전부이다. 말하자면 그는 기억의 층위 안에서 영웅으로 재탄생한다.


하지만 이것은 영웅의 승리가 아니다. 그가 공동체의 기억 안에서 영웅으로 탄생한 것은 뒤집어 얘기하면 공동체가 그를 잊어버릴 때 더 이상 영웅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은 영원하지 않다(장례식 시퀀스에서 와타나베의 정신을 이어받자고 부하 직원들이 다짐할 때 그들은 모두 술에 취해있다). 그의 영웅으로서의 행적은 영화 안에서 그가 누린 쾌락과 달리 현재화되지 못했다. 그건 공동체의 현재가 그를 영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현재에는 영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럴 때 영웅은 과거의 존재로 남게 된다. 영웅은 과거에 필요했던 자에 불과하다. 장례식 시퀀스가 끝난 후 새롭게 배정된 시민과 과장은 와타나베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다짐과 달리 다시 관료주의적인 태도로 회귀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한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을 노려본다. 부조리에 대한 저항. 물론 그 저항은 일시적이다. 영웅의 존재는 그렇게 세계에서 밀려난다. 그럼에도 이 직원은 와타나베가 만든 공원을 바라보며 그를 기억한다. 영웅의 유령을 소환하는 것. 구로사와 아키라는 사라져 가는 영웅을 끝까지 기억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최선의 애도이자 세계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영화와 카메라를 통해 실현한다. <나쁜 놈일 수록 잘 잔다>에서 최후를 맞이한 영웅의 자리를 응시하는 카메라처럼. 와타나베의 공원을 응시하는 카메라와 그 공원을 지켜보는 직원의 모습은 어쩌면 새로운 영웅의 탄생에 대한 예견이자 와타나베라는 영웅의 흔적을 담아내고자 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마지막 애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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