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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Jul 10. 2023

가면으로서의 감정, 감정의 카오스모스

존 카사베츠-<얼굴들>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나는 존 카사베츠를 시네마테크에서 처음 만났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해가 저물어 어두워진 저녁에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나는 이제 막 영화의 세계로 들어온 초보 시네필이었다. 그전까지 카사베츠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다지 큰 기대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몇몇 비평과 시네필들에게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보았지만 다른 거장들만큼 추앙받는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저 지나가는 여러 이름 중 한 명으로 생각하며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그의 데뷔작 <그림자들>을 만났다. 영화가 끝난 뒤 나는 완전히 쇼크를 받았다. 영화 자체가 엄청난 걸작이라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이전에도 실험적이라는 영화들은 많이 보았지만 <그림자들>이 주었던 미학적 쇼크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 감독의 영화들은 찾아보기 시작했다. 존 카사베츠는 지나가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거장이었고 나는 이 거장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존 카사베츠의 영화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감정이라는 가면의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종종 카사베츠의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인물들을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인물들은 자신만의 논리와 이성을 통해 행동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지배하는 감정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감정의 노예로서의 캐릭터. 이때 카사베츠의 카메라는 인물들의 얼굴을 가까이 잡아내면서 그 감정을 카메라 안에 담아내고자 한다. 감정의 기호. 얼굴이라는 표상. 이 얼굴은 인물에 대한 지시적 대상이 아닌 인물의 유동적인 감정을 담아내기 위한 무대이다. 그렇기에 얼굴은 그 자체로 수많은 가면의 집합체이다. 가면 뒤의 가면. 가면이라는 기호. 그 기호들이 영화 안에서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대신 자유분방하게 운동할 때 카사베츠의 프레임은 비로소 카오스모스가 된다. 어떠한 언어적 규정도 거부하는 상태. 그렇기에 카사베츠의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우리는 그러한 감정적 경험의 실체를 정의 내리기 어렵다. 낯선 감각. 언어를 뛰어넘는 감각의 향연. 그의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감정이 아닌 모든 감정이 한데 모여있는 감정의 소용돌이 그 자체이다. 즉흥연기로 이루어진 <그림자들>. 신경쇠약의 지나 롤런즈를 따라가는 <영향 아래 있는 여자>와 <오프닝 나이트>. 일탈을 꿈꾸는 남자들의 영화인 <남편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영화가 나에게는 <얼굴들>이다.


<얼굴들>에는 서사가 없다. 존 카사베츠는 서사를 구성하기 위해 인위적인 사건을 만들어내는 감독이 아니다. 대신 사건이 부재하는 일상 안에서 인물 자체를 감정의 노예로 만들면서 일상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되도록 한다. <얼굴들>은 그러한 일상을 담은 영화이다. 그리고 인물들의 일상은 일탈과도 동일시된다. 그건 인물들이 도덕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억압에서 벗어난 감정들의 운동과 그 운동의 선율을 담아내는 것이 카사베츠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일탈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일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일상이며 도덕의 이름 하에 있는 일상과 공존한다. 두 개의 세계. 그 세계를 배회하는 유령들. 일탈과 일상의 세계를 오가면서 인물들은 매번 다른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을 따라 행동한다. 그것은 미국 중산층의 위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 카사베츠가 바라보는 인간의 본성이다. 카사베츠는 그 가면들 중 무엇이 진짜 그들의 얼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진실이고 모든 가면이 진짜 얼굴이다. 영화의 오프닝. 마치 프롤로그처럼 이후의 장면들과 분리된 이 장면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사무실에 모이는 장면이다. 이 프롤로그는 이후 이어지는 영화가 마치 영화 속 영화인 것 같은 효과를 자아낸다. 스크린 안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인물들. 그것은 곧 프롤로그 이후 장면들은 인물의 본모습이 아닌 인물들의 연기라는 뜻이다. 통상적인 영화라면 영화 속 영화가 끝난 후 인물들의 실제 세계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존 카사베츠는 그 이후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인물의 본모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수많은 가면들이 그 자체로 그들의 진실된 모습이고 인간은 그 가면을 끊임없이 바꿔가며 존재할 뿐이다. 감정의 주체가 아닌 감정의 노예로서의 존재. 그 아름다운 혼돈. 그 풍경과 마주할 때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영화적 경험을 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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