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태어나기는 했지만>, <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보는 것만 같다. 물론 대다수의 거장들은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와 그 세계를 지탱하는 논리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즈 영화에도 내러티브와 인물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즈의 영화를 볼 때면 한 편의 영화를 본다기보다는 세계 그 자체가 영화 안에 온전히 담겨 있고 카메라는 그걸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라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일상이라는 세계. 그 세계를 바라보는 관찰이라는 방식의 창작. 이때 오즈 야스지로가 관찰하는 것은 단순히 세계가 아닌 세계의 변화이다. 역사의 흐름. 도덕의 변화. 그렇기에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따라가는 것은 역사와 시간의 흐름 하에서 서서히 변해가는 도덕을 지켜보는 일이다. 초기의 오즈는 그러한 세계의 변화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저항을 시도했으나 후기로 올수록 그러한 변화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변화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낸 작품들이 <태어나기는 했지만>과 <안녕하세요> 일 것이다.
두 작품의 뚜렷한 공통점. 모두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여기에서 오즈의 목표는 명확하다. 아이들의 눈에 담긴 세계를 감각하는 것. <자전거 도둑>과 <독일 영년>에서 폐허가 된 유럽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처럼. 혹은 소년의 시선을 경유하여 파리의 모습을 담아낸 <400번의 구타>처럼. 그렇다면 두 작품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히 인물이 바뀌었다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두 작품 사이에는 27년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간극이 존재한다. 오즈 야스지로는 이 간극 사이에서 무엇이 바뀌었는지를 바라본다. 먼저 <태어나기는 했지만>. 영화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동경하던 부모와 어른의 세계가 사실 위선으로 가득 찬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질서와 도덕의 이면. 하지만 오즈의 아이들은 이러한 위선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은 세계 자체가 이러한 어른들의 위선으로 유지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무슨 의미인가? 아이들에게 어른은 하나의 기호이자 표상이다. 아버지라는 표상, 어머니라는 표상. 그 표상에는 어떠한 결함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 표상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표상들을 발견함으로써 자신들이 존경하는 어른들마저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표상의 집합체. 엄격한 아버지인 동시에 자신의 윗사람을 모셔야 하는 회사원이라는 존재. 그렇기에 어른들의 위선은 아이들에 대한 기만이 아닌 세계 안에서 존재하기 위한 전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그러한 위선을 무릅쓰고 살아가야만 하는 어른들의 삶에 담긴 비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오즈 야스지로는 이렇게 세계를 찬양하는 대신 불완전한 세계를 지탱하는 도덕과 인간을 긍정한다.
하지만 <안녕하세요>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사라진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은 도덕으로 귀결되기를 거부한다. 대신 도덕이 아이들에 의해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영화에서 어른들의 세계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어른들 사이의 긴장감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오즈가 바라보는 도덕의 세계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세계가 아닌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불완전함을 내포한 세계이다. <태어나기는 했지만>에서 오즈의 아이들은 그 도덕의 세계를 경멸하면서도 결국 긍정했다. 하지만 <안녕하세요>의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어른들의 도덕에 반항한다. 미노루와 이사무 형제는 부모가 tv를 사다 주지 않자 묵언수행까지 하며 부모를 조른다. 어른들의 언어를 거부하는 아이들. 어른들의 언어는 무엇인가? 매일 주고받지만 아무런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공허한 인사말. 도덕을 위한 텅 빈 언어. 아이들은 언어를 거부하면서 그러한 어른들의 도덕 역시 거부한다. 분명 이전의 오즈라면 어떤 식으로든 아이들을 도덕에 복종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1950년대이다. <태어나기는 했지만>과는 27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있다. 그 사이에 세계의 질서는 변화했다. 오즈는 그러한 변화를 수긍한다. 미노루와 이사무의 부모는 결국 그들에게 tv를 사준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입을 열고 활기찬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인사를 거부하던 이전과 달리 이웃 어른들에게도 활기차게 인사를 건넨다. 이 순간 어른들의 도덕을 위해 공허하게 오가던 인사말은 아이들의 활력으로 가득 찬 진정한 언어로서 자리 잡는다. 도덕이 변하는 순간. 더 이상 아이들은 도덕에 복종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도덕에 저항하고 변화시킨다. 오즈는 이 변화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관찰의 예술. 변화를 바라보는 카메라. 아무런 저항 없이 세계의 흐름에 몸을 맡길 때 비로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완성된다.
물론 이것만으로 오즈 야스지로라는 위대한 이름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변화는 오즈의 필모그래피를 바라보면서 내가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자 세계에 대한 오즈의 태도의 핵심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감독보다도 오즈 야스지로만큼은 최대한 필모그래피를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래야만 세계에 대한 오즈의 태도의 변화를 그대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는 결국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단순히 한 편의 영화를 넘어서 온전한 세계 그 자체라는 사실과 만날 것이다. 창조를 넘어서는 관조. 관찰이라는 이름의 창조. 오즈 야스지로는 세계를 바라보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탄생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가장 위대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