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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재 May 02. 2023

순수한 믿음의 순간

에른스트 루비치-<모퉁이 가게>


나는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이야기할 때이든, 세계의 운명을 말할 때이든 낙관보다는 비관을 더 앞세우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낙천적이고 희망을 쉽게 이야기하는 듯한 영화에는 마음이 잘 가지 않는 편이다(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오히려 나는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가 세계를 냉소하고 인간의 존재를 비관적으로 바라볼 때 진정으로 힘을 지닐 수 있다고 믿는다. 그건 그러한 방법론이 반드시 옳다는 것이 아닌 나와 유사한 가치관과 시선을 공유하는 작품들에 대한 윤리적 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태도에 대척점에 있으면서 균열을 일으키는 영화를 만나는 순간들이 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인간에게 믿음을 주는 영화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결함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품에 안아주는 것만 같은 영화들. 그러한 순간 중 하나를 나는 <모퉁이 가게>에서 만날 수 있었다.


먼저 한 가지. 나는 에른스트 루비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본 그의 영화는 <니노치카>와 <사느냐 죽느냐>등으로 대표되는 몇 편의 후기작들이 전부이다. 분명 그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가 할리우드로 넘어오기 전 독일에서 찍은 영화부터 차례로 이야기하며 그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작품들만을 이용해서도 어느 정도 루비치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닐 테지만 이 자리에서는 차라리 영화의 내적 논리, 혹은 더 나아가 오직 그 장면이 그 자체로 지니는 어떤 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모퉁이 가게>에 국한하여, 더 정확히는 영화에서 나를 완전히 매혹시켰던 한 장면을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할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크리스마스이브 영업을 무사히 마친 후 가게 직원들이 하나씩 퇴근한다. 가게 사장인 마더첵은 문 앞에서 고생한 직원들과 한 명씩 인사를 나눈다. 화면 안에서는 부다페스트의 크리스마스를 축복하는 듯 눈이 내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 들어온 심부름꾼인 루디와도 인사를 나눈다. 그러다가 루디가 크리스마스이브를 홀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루디에게 마더첵 사장이 저녁 식사를 제안한다.

“루디 군, 치킨 수프 좋아하나?“

”그럼요.“

”사과가 든 거위 구이는? 삶은 감자와 버터, 양배추는 어떤가?“

”정말 좋아합니다.“

”오이 샐러드와 사워크림은? 바닐라 소스를 얹은 애플 슈트루델은?“

”굉장하겠네요!”


이 장면, 이 대사들을 보는 순간 나는 저절로 어떤 미소를 띠게 되었다. 이건 유머에서 비롯된 것도, 뛰어난 완성도에서 기인한 미소도 아니었다. 이 장면에서 에른스트 루비치는 영화 속 인물을 순수하게 믿고 있는 것만 같다. 인간에 대한 믿음. 영화 초반부에는 그토록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던 악덕 사장이 이제 부모와 떨어져 홀로 외롭게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야 하는 소년에게 손길을 내밀어 준다. 물론 이 장면이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사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이 장면이 주었던 푼크툼과 같은 감정은 어떠한 논리나 개연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훌륭한 영화를 보며 뛰어난 완성도와 독창성에 감탄한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어떤 장면을 보고 나서 진심으로 미소를 지은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나에게 있어 이 장면의 비밀은 서사의 논리도, 미장센도, 촬영도 아닌 오직 루비치 자신의 순수한 믿음에 있다. 인간을 향한 믿음. 어떠한 인간이라도 끝내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무한한 믿음. 그리고 바로 내 옆에 있는 이웃을 향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순수한 사랑. 마치 에른스트 루비치는 그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이 세계를 버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분명 그의 이러한 태도는 나의 믿음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나와 대결해야 할 대상이 아닌 세상을 마주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자 영화가 지닐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 믿음의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배움의 순간. 나와 전혀 다른 태도에 대한 수용의 순간. 그렇기에 나는 루비치의, 그리고 이 영화의 순수한 낙천성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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