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리베트-<아웃 원>
솔직한 고백. 나는 자크 리베트 영화 중에 걸작이라고 부를 만한 영화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혹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걸작과 거장이 반드시 동치 되지는 않는다고 믿는 편이다. 내게는 그런 이름들이 몇몇 있다. 예컨대 빔 벤더스. 혹은 끌로드 샤브롤. 아니면 프랭크 카프라. 나는 아직 이들의 영화들 중 걸작이라고 단언할만한 작품을 보지 못했지만 이들이 거장이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나는 거장이라는 칭호는 단순히 걸작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그 예술가가 창조한 세계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와 그 세계를 담아낸 영화 사이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창작자의 인장. 그것이 스타일의 문제이든, 내용의 문제이든, 아니면 태도의 문제이든 거장이라 불리는 자들의 영화에는 확고하게 그 사람의 영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것만 같은 인상이 든다. 그렇기에 거장이 창조해 낸 영화적 세계란 세계를 바라보는 창작자의 태도와 형식이 집약된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자크 리베트는 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리베트의 세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기호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많은 이들이 자크 리베트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음모론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쓴다. 음모론이란 무엇인가? 세계라는 기호 뒤에 또 다른 기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이 기호들은 어떻게 움직이고 상호작용하며 관찰되는지에 따라 다르게 의미가 형성된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 세계라는 미스터리. 자크 리베트는 영화 속 세계를 하나의 텅 빈 기호, 즉 제로 기표로 만들고 인물들은 이 세계라는 기호를 해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때 자크 리베트는 자신의 음모론에 몰두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스크린 위에 표현하는 대신 그 인물들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본다. 그럴 때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서사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기호가 된다. 기호의 운동. 기호가 되고자 몸부림치는 인물. 그래서 자크 리베트의 인물들은 기이하면서도 동시에 종종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예컨대 <북쪽에 있는 다리>에서 용에게 대결을 선언하는 밥티스트의 모습은 얼마나 우스운가?(사실 음모론 자체가 외부의 시선에서는 항상 우스운 것이 아니던가?) 이건 세계의 기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곧 자크 리베트가 말하는 영화의 존재론일 것이다. 세계라는 미스터리. 그 앞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영화라는 예술.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돈키호테적인 동시에 들뢰즈적인 영화. 항과 계열의 끊임없는 생성. 기호로서의 영화. 인물이라는 기호. 서사라는 기호. 그리고 영화라는 기호. 어찌 보면 누벨바그 감독들 중 영화에 대한 질문을 가장 멀리 밀고 나간 인물은 장 뤽 고다르가 아닌 자크 리베트일지도 모른다.
그런 자크 리베트의 세계가 가장 잘 표현된 영화를 뽑으라면 그가 수잔 쉬프만과 함께 만든 <아웃 원>을 고를 것이다. 물론 이 선택에도 어떤 망설임이 따라온다. 일단 나는 <아웃 원>이 자크 리베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오히려 <파리는 우리의 것>이나 <메리 고 라운드> 같은 영화들이 더 인상 깊게 다가온다). 게다가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무려 12시간이 넘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만큼 자크 리베트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가 잘 드러난 영화는 없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인물들의 이야기. 하지만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배반당할 것이다. <아웃 원>은 서사가 아닌 서사와 인물의 운동을 따라가는 영화이다. 서사의 운동. 인물의 운동. 한 마디로 기호의 운동. 기호들의 충돌과 상호작용. <아웃 원>의 러닝타임이 이렇게나 길어진 이유가 있다면 그 운동의 연쇄를 최대한 늘리면서 스크린 위에 무엇이 나타나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자크 리베트의 실험일 것이다. (약간의 무례함을 무릅쓰고) 미리 결말을 이야기하자면 영화에서 연극은 결국 완성되지 않는다. 그건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단일한 기호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크 리베트의 선언이다. 기호는 세계의 가능성이 될 수 있을지언정 진실이 될 수는 없다. 대신 자크 리베트는 세계 안에 우글거리는 기호들을 그 자체로 긍정하고 그 기호들의 운동이 생산해 내는 가능성들을 이야기한다. 가능성의 우주. 하나의 거대한 ‘카오스모스‘. 나는 그의 영화들을 통해 영화가 가지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마주했다. 거장의 세계. 그 가능성이 당신에게도 닿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