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아픔에 고개만 끄덕이거나, 쉽게 잊어 아차 하지 않고 오랜 고민 끝에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공감을 하고 싶었다. 기쁜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가 손뼉 쳐 주고,맛있다고 소문난 집에서 따끈한 밥을 사주는 사람이고 싶었다.
내 일상을 온전히 기억하는 것도 힘든데 다른 사람의 감정을 신경 쓰다니 에너지 낭비, 시간낭비 아닌가? 설사 시간과 마음을 낸다 해도 당사자의 마음이될 수 없으니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내 삶이나 잘 꾸리자 싶었다. 허나 나만 잘 챙긴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녔다.모든 게 잘 풀리는 상황에도 채워지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아무 방해 없이 혼자 있고 싶어 떠난 여행에서조차 맛있는 음식, 감탄이 절로 나오는 풍광앞에선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어 졌고, 너무 좋잖아! 함께 발을 동동 구르고 티키타카 주고받을 친구가 간절해졌다.행복은 나눠야 두배가 되는구나 식상한 말이 진리임을 깨닫고,아무리 부족함 없는 삶이라도 그 기쁨을 공유하지 못하면 때론 가난한 마음이 될 수 있겠다생각했다. 슬플 때도 마찬가지. 거창한 도움이 필요했던 적은 없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에 투박하게 등을 쓸어주는 정도의온기면 충분했고, 이런저런 불평을 가볍게 떠들며 웃어 줄 친구 한 명이면 잔뜩 꼬인 마음도 자연스레 풀리곤 했다.
단 한 사람만 곁에 있어도 살만한 세상이다 여길 수 있고, 따뜻한 밥 한 끼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내가 그 단 한 사람으로, 밥 한 끼 사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그런데 현생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갔다. 주어진 역할만 간신히 해낼 뿐, 타인의 삶을 바라볼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각기 다르게 요구되는 역할과 원하는 삶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무엇도 기대만큼되는 게 없었다. 바라는 인생과 현실의 내 모습, 괴리가 느껴질 때 내 삶의 꾸깃꾸깃한 구김살들을가만히 살펴본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이름 없는 생각과 감정을 하나씩 펴보며 삶의 방향을 점검하는 것이다.
이대로 괜찮아? 지금 모습 만족스러워?
만족스러운 것도 있고, 불만족스러운 것도 있다. 괜찮지만 괜찮지 않기도 하다.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것 같고 떠밀려 살고 있는 기분도 든다. 직장생활을 정리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모든 게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휴직했을 때의 답답한 마음을 동시에 떠올려본다. 돌이켜보면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고 한가했던 것은 아니다. 돌봄이 온전히 내 몫이었기에 느끼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다. 공식적인 회식이나 모임이 없으니 저녁 외출은 꿈도 꿀 수 없었고(저녁의 만남을 매우 사랑한다) 간혹 모임이 생긴다 한들, 종일 부스스하게 있다 저녁 무렵 외출 준비를 하려면 세상 귀찮아졌다.
휴직을 할 수 있음이 감사했고 출퇴근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행복했음에도 조직을 벗어나니 나란 존재가 경계 없이 희미해져 우울해지는 순간도 많았다. 시간적 여유가 생겼지만 나와 가족을 돌보느라 여전히 주변 사람을 챙기지 못했다. 좋은 점만큼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있어 어떤 선택이 좋을지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어쩌면 좋을까? 충분히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삶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함께'일까? '충분히'일까? '슬퍼하고, 기뻐하는' 삶일까? '충분히'에서 충분히에는 감정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씀씀이도 포함되어 있음을 이제 안다. 돈을 아껴야 할 때는 마음도 아꼈다. 돈을 벌지 않을 때는 조금 옹졸해졌고 한번 더 계산했다. 돈을 버는 나는 넉넉해졌고 관계에서 셈하느라 머리 아파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어느 면에서는 직장을 다니는 쪽이 충분한 공감에 이롭다는 말이다.
나는 가늠하는 중이다.
경제적인 지원과 감정적인 공감 중 어느 편에 더 충분해지길 원하는지. 또는 그 균형점에 가까워지는 시점이 언제일지.
고맙고 미안한 친구라고 마음에 새겼으면서 8년의 시간을 무심하게 흘러 보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며 쓰게 된 글이다. 동시에 그래도 내게 여유가 있는 것은 돈을 벌기 때문은 아닌가. 직장에서 자아실현을 하기 때문 아닌가. 여유 있는 마음의 근원을 생각하며 쓰게 된 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