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수연 Mar 19. 2019

다행이야, 매일이라

입사 3년차에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이라는 저녁 시사 프로그램의 조연출을 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회의를 통해 아이템을 정하고, 그 이슈에 대해 가장 잘 얘기할만한 사람을 찾아 섭외한 뒤 원고를 작성하면 저녁 6시부터 8시까지의 생방송으로 그날의 노고가 현실화된다. 나야 초짜 조연출인지라 프로그램 내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지 않아서 전선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어야 했)지만, 매일매일 아이템 하나씩을 맡아 섭외하고 원고를 써야 하는 작가들이나 최종 책임자인 연출 선배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다룰만한 아이템인지 아닌지 판단을 잘 못해서, 적절한 사람을 섭외하지 못해서, 진행자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인터뷰이가 긴장해서 등등 방송이 만족스럽지 못할 이유는 곳곳에 잠복해 있었다. 방송이 끝나면 ‘영혼까지 탈탈 털린’ 상태가 되기 일쑤였고, 긴장감이 탁 풀리고 난 뒤의 허탈함을 술한잔으로 달래고 나서야 퇴근한 적이 많았다. 그건 말 그대로 ‘노동주’였다. 농부들이 밭일 하면서 마시는 탁주 한사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하루를 마감하며 털어넣는 소주 한 잔, 딱 그 의미의 술잔이었다. 위로, 안도, 다시 반복될 내일로부터의 도피.

방송이 아쉬웠던 날은 피디도 그렇지만 작가들이 참 괴로워 했다. 어떤 부분에 실수가 있었던 걸까 자책하게 되고 진행자와 다른 스탭들에게도 미안해 한다. 그런 날이면 연출 선배가 자주 하던 얘기가 있다.
“야, 매일 하는 건데 어떻게 매일 잘 하니? 이틀 잘 하고 이틀 별로고 하루 평타 치는 거야. 그러면 돼. 근데 솔직히 우린 그것보다 낫잖아. 잘 하고 있어.”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마음에, 저 말은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주 5일 중에 이틀만 잘 하면 된다니, 마치 커트라인을 90점에서 40점으로 낮춰주는 것과 같지 않은가. 100점은 못 돼도 80점은 돼야 할 것 같은데 벌써 오늘 하루 틀린 것 같아 침울한데, 연출이 시원하게 결론을 내려 준다. 합격! 지난 이틀 잘 했으니 이번주는 이미 합격!

라디오 방송이 갖는 중요한 특징의 대부분이 ‘매일 한다’는 데에서 나온다. 분명 연예인임에도 유독 DJ에게는 터무니없는 친근감을 느끼는 이유, 연예인들이 라디오 DJ 제안을 받을 때 망설이는 이유, DJ들로 하여금 라디오를 그만두게도 만드는 이유, 그럼에도 마지막 방송이면 여지없이 눈물을 보이며 애틋해하는 이유, 라디오PD들이 여타 예능이나 드라마PD에 비해 생활이 단조로운 이유, 별것 아닌 라디오 광고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 청취율이 오르거나 떨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 DJ의 됨됨이가 결국에는 드러나는 이유, PD와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프로그램에 묻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 모두 매일 하기 때문이다. 매일 하기 때문에 힘들고, 지겹고, 정도 든다. 매일 하기 때문에 결국엔 들킨다. 매일같이 차곡차곡 만들어진 이미지, 흐름, 기세이기 때문에 바꾸기가 어렵다. 그래서 라디오가 무섭다. TV나 영화, 다른 어떤 트렌디한 미디어가 보여주는 ‘빵 터지는’ 화려함은 없지만 매일매일 쌓아가는 이야기들은 라디오가 가지는 힘이다. 시간이 무섭듯, 일상이 무섭듯, 밤새 조용히 내리는 눈이 무섭듯 라디오가 무섭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가장 힘든 점이 ‘방송을 매일 해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가장 위로가 되는 부분도 그 지점이다. 이런 일 저런 일 다양하게 벌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매일 하는데 어떻게 매일 좋겠나,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이상할 때도, 고약할 때도 있는 게 자연스럽지. 수많은 하루 중에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게 뭐든 받아들이기가 덜 심란하다. 매일 잘할 수 없기 때문에, 매일 기회가 있다는 게 다행스럽다.  

 

작가의 이전글 덕질을 리스펙...(알바몬 쌈디 말투 ver.)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