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수연 Mar 26. 2019

가난은 눈에 보이지

하율이가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잃어버렸나보다. 학교 일과 중에 도서관에 가는 시간이 있는데, 벌써 며칠째 혼자 교실에 남아서 잃어버린 책을 찾았다고 한다. 선생님께 “책이 없어졌어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이 교실에서 찾아보라고 하셨고, 하율이는 그 이후로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을 못 해서 계속 도서관에 못 간 것이다. 나는 하율이에게 그럴 수도 있다, 사서 선생님께 잃어버렸다고 말씀드리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여쭤봐라, 같은 책으로 사오라거나 책값을 가져오라거나 뭔가 말씀해주실 것이다, 얘기했다. 실수긴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다,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옛날의 나였다면, 내 어린시절이었다면 어땠을까. 책값이 정말 부담이었을 집안 사정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엄마나 선생님한테 ‘책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가난한데다 소심하고 수완도 없던 나는 전전긍긍하다가 영영 도서관에 발길을 끊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난하지만 수완 좋은 다른 어떤 친구였다면 나름의 방법을 찾았을 수도 있었겠지.
 
가난...
가난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지금껏 발 담가온 모든 집단에서 늘 내가 제일 가난했다.
진학하는 학교마다, 모임마다, 교회에서도, 회사에서도.
연수원에서 첫 주를 보내고 난 주말에, 남자친구에게 “MBC에서 내가 제일 가난한 것 같다”고 했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런 건 그냥 알 수 있다.

가난은 눈에 보인다.
가난은 냄새가 난다.
가난은 살갗으로 느껴진다. 겨울엔 살을 에고 여름엔 땀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가난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가난은 심장을 움켜쥔다. 손발을 묶는다.
가난은 성격도 빚는다.
착하게 -미담이 되어 도움을 끌어낼 수 있도록.
밝게 - 이왕이면 감탄도 자아낼 수 있도록.
권리에 민감하되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지나치지는 않게 - 거슬리지는 않도록. 알아서 스스로의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도록.
가난은 흔적을 남긴다. 대체로 상처라는 형태다.
그래서 가난은 가난을 알아보는데, 심지어는 가난했던 과거도, 유년기의 지나간 가난도 알아본다.
아니다. 가난은, 특별히 가난했던 유년기를 더 잘 알아본다.
가난과 적당히 화평하며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진정으로 친밀해질 수는 없다.
내 경우 그랬다. 부유했던 친구들과 진정으로 친밀함을 느꼈던 기억이.....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내가 남편과 친해진 게 우연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주말에,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던 시골집엘 들렀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지나가면서 잠깐 내려 서성여보기만 했다. 나는 지금도, 거기 살고 있는 내가 진짜 나 같다. 내가 그 집을 떠나왔다는 게 어색하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임시 거처 같고, 거기서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두 동생과 힘겹게 복닥거리며 살았던 시간으로 돌아가야할 것만 같다. 가난하지 않은 내가 어색하다. 나는 가난해야할 것만 같다. 가난해질 것만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