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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Oct 17. 2022

죽음까지도 내 것이길 원하는

아이들은 가혹하다

엄마의 기일이 다가온다. 6주기를 목전에  지금에야 입밖으로   있는 말이 있다. 나는 최근까지도 엄마에게  섭섭했다. 돌아가시던 순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찾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동생들  하나였어도 괜찮았을 텐데, 엄마는 뇌출혈로 쓰러지는 와중에 자식 누구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교회 담임목사님에게 전화하셨다.

장례식장에서 목사님이 전해주셨다. 엄마가 전화를 걸어 와 ‘지금 버스 안인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하셨다고. 그게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고, 1주기와 2주기를 보내는 내내 그 사실이 자꾸 곱씹어졌다. 서운하기도 했고 괘씸하기도 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생각나는 게 자식들이 아니라 목사님이라고? 엄마의 깊은 신앙심이야 익히 아는 바이지만, 그래도 너무 한 것 아닌가? 엄마의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면 더더욱 복장이 터졌다. 그놈의 교회, 그놈의 신앙! 딸에게서 엄마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져가다니, 정말 지독하다.

3주기, 4주기, 5주기를 지나고, 이제 봉안당에 가도 ‘ 철철보다 ‘방울방울 마음에 가까워질 즈음 문득 깨달아졌다. 어쩌면 엄마는 유언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를 했을 수도 있겠다고. 엄마가  말이 ‘머리가 너무 아프다였다는  단서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으면 당연히 나와 동생들에게 전화해서 유언을 빙자한 잔소리를 했을 분이다. 신앙생활  해라,  먹는  우습게 생각하지 말고  챙겨라, 재미나게 살아라, 권서방한테  해라, 아이들 많이 사랑해줘라. 평소에도  하시던 말씀이라서 듣지 않아도 맞힐  있다. 엄마는 본인이 너무 아프니 병원이든 119 연락해 달라고 얘기하려 했고, 도움  사람으로 목사님을 떠올린 거다. 멀리서 자기 일로 바쁜 이 아니라.  

자식이란 이토록 잔인하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라는 내내 부모의 시간과 에너지를 통째로 갈아마시고, 그걸로 모자라 부모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것이길 원한다. 정작 본인은 부모가 위급할 때 찾을만한 존재가 아니면서. 나만 그런 건 아니다. 내 자식들도 내게 참 가혹하다. 아이들은 내가 아픈지 바쁜지 우울한지 관심이 없다. 몸살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것 같아도, 회사에서 다 못한 일을 노트북 째 싸들고 퇴근했어도, 마음이 고되 간신히 숨만 쉬는 날에도, 밥 달라고, 똥 치우라고, 안아달라고 요구한다. 울며불며 침대에 누운 나를 흔들어대는 세살박이 아이만큼 잔인한 존재가 또 있을까. 나의 기운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내 사랑스런 아이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은 참으로 진리이다. 이 우주에 없던 무언가가 생겨나려면, 숨만 쉬는 콩알 하나가 140억 개의 뇌세포를 지닌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 변화하려면, 그 대가는 무엇이어야 할까. 존재의 대가는 존재, 시간의 대가는 시간, 생명의 대가는 생명. 자식을 키우며 깨닫는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아이의 그것과 바꾸고 있구나.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말로 하면 생명, 혹은 존재 그 자체 아니겠는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알콩달콩, 꽁냥꽁냥 재미있기만 한 건 결코 아니다. 그들은 뱃속에 자리잡은 순간부터 가차없이 나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흡입한다. 그렇지만 어찌 생각하면, (돈은 모르겠지만)시간과 에너지는 어차피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휘발되지 않나. 아낀다고 모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해도 흘러갈 시간이고 사라질 존재인데, 그걸로 다른 어떤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만큼 가치있는 소진이 또 있을까.

한정된 시간과 돈을 어디에 쓸지 갈림길에 놓일 때 나는 어김없이 아이에게 진다. 얼마 전엔 오랫동안 해 오던 PT를 중단했다. 아이들의 피겨 스케이팅 레슨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내 운동은 회당 6만원짜리 개인PT에서 월 7만원인 동네 공공 헬스장으로 바꿨다. 크게 아쉽지는 않다. 시간에 비해 이런 건, 양보하기 쉽다. 영화 <소울>에서 ‘조 가드너’가 태어나지 않은 영혼 ‘22’에게 하는 말이 종종 떠오른다. “괜찮아. 난 이미 살아 봤잖아. 이젠 네 차례야. 같이 가 줄게. 갈 수 있는 데까지만” 나도 속으로 아이들에게 말한다. 네 차례야. 엄마가 같이 가 줄게. 어디까지 가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허락된 만큼 최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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