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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Mar 21. 2023

생물학의 한계는 그렇게 풀리지 않는다

<생명을 묻다> 감상평

통념과 다른 발상을 말하는 책은 귀하다. 기억나기로는 18년 전에 나왔지만 아직 세상을 깨고 있는 <페미니즘의 도전>부터, 작게는 서울에서 집을 짓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 <아파트 담장 넘어 도망친 도시 생활자>까지. 이런 책을 읽으면 살고 있는 세상이 한 번 깨지는 기분을 가볍게 느낀다. 


<생명을 묻다>에서도 그런 기분을 기대했다.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생물학을 비판한다는 책 소개를 보며 대안을 찾기를 바랐다. 나는 생물학의 한계를 논할 깜냥은 못 되지만, 적어도 내 삶에서 분자세포생물학 말고 다른 생물학을 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책은 생물학 환원주의에 대한 본래 생각을 굳히는 결과만 낳았다. 주류의 생각이나 기존 패러다임이 꼭 틀린 건 아니다. 섣부른 문제 제기는 독자를 설득하지 못한다. 


레퍼런스가 많은 점은 훌륭하다. 차례부터 한 챕터에 생물학과 관련한 사상가(?)의 이름이 두 명씩 들어간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찾았을 지 알 만 하다. 한 학기 준수한 교양 수업을 담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이 수업이었다면 나는 강의계획서(차례)가 맘에 들어 수업을 신청했을 것이다. 교수는 일주일에 한 챕터씩 수업을 진행하며 ppt 마지막 장에 참고문헌 리스트를 달았을 것이다. 나는 주마다 참고문헌을 열심히 읽고 토론 게시판에 어그로를 끌었을 것이다.


교양 수업과 책은 다르다. 수업이라면 교수는 배경 지식을 설명만 해도 된다. 학생 각자가 수업 주제 중 하나를 정해 레포트를 쓰거나, 토론 게시판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까지가 수업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라면 자료를 녹여 나온 스스로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정확히는, 저자의 생각이 먼저이며 자료는 그것을 뒷받침하기위해 존재하는 퍼즐 조각이다. 저자는 많은 자료를 소개한다. 그러나 확실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생각은 있지만 문장으로 꺼내지 않고 비겁한 물음표로 끝낸다. 어차피 나도 수업을 듣듯 책을 읽지는 않았다. 일주일에 한 챕터씩 씹어먹기는커녕 출퇴근 지하철길에 후루룩 읽었다. 지식보다 느낌만 남았는데 좋은 느낌은 아니다. 그래도 참고 문헌에서 눈에 띄던 책 한 권은 샀으니, 이것이 수확이다.


저자는 지구 최초의 생명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지금의 가설과 발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현재의 복잡한 생명도 자연선택만으로 생겨났다고 보기에는 반례가 있다고 말한다.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다가 지나가듯 착한 사람의 예시로 어려운 사람을 위해 평생을 힘쓴 목사를 든다.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에 대해 무종교인들이 일으키는 경기를 생각하면 이해는 가는 비겁함이다. 당장 나라도 책에 창조론이 담겼다면 결코 내 돈 주고는 사지 않았을테니.


인류가 절대 알지 못할 세상의 신비는 분명 존재한다. 그것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 본연의 한계일 수도 있고, 단순하게는 연구비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물질만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다른 요소는 필요 없다. 신이 들어올 여지는 더더욱 없다.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은 영역에 인간이 상상 가능한 무언가를 억지로 넣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이해 가능한 지식을 기반으로 찾을 수 있는 영역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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