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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Oct 30. 2024

장르에 속하지 않는 장르소설

N.K. 제미신 <십만왕국> 서평단 서평

<십만왕국>은 <부서진 대지 3부작>으로 유명한 N.K. 제미신의 데뷔작입니다. 주인공 예이네의 뿌리를 찾는 여정이자, 신과 인간의 암투가 복잡하게 섞인 이야기입니다. 한국에는 총 네 권으로 번역된 <유산>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이자, 자체로 완결성이 있는 작품입니다.


<십만왕국>은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어느 풍의 판타지도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없던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 작가가 하나하나 고심하며 요소를 설정했습니다. 작중에 나오는 신은 오늘날의 종교와도, 우리가 아는 고대 신화와도 닮지 않았습니다. <십만왕국>의 주요 인물들이 속한 ‘아라메리’ 가문이 세상을 지배하고 자신을 지키는 방식도 독특합니다. 


감사하게도 황금가지 서평단에 선정되어 일찍 읽게 되었습니다.


배경이 새롭더라도 인간은 한결 같은 법. 아라메리 사람들은 독자에게 익숙한 동기,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살아남을 힘을 갖기 위해 싸웁니다. 아라메리가 있는 ‘하늘’은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의 세계, 권력을 갖지 못하면 목숨을 잃습니다. 그렇지만 작중에는 아라메리 사람들만큼 신이 자주 등장합니다. 불멸하고 전능한 신들에게 인간의 권력 다툼이 중요할까요? 이들에게 인간의 싸움이란 찰나에 일어나는 사건일 뿐인 텐데요. 작가는 신을 신답게 묘사하면서도 상상력을 발휘해 필멸자와 불멸자가 같은 무대에서 팔을 걷도록 만들어냈습니다. 


작가는 이 세계를 만드는데 힌두 신화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신과 세 주신(主神)이 있다는 개념은 비슷합니다. 제가 힌두 신화를 잘 알지 못해, 신의 종류와 각각의 상징이 얼마나 대응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화는 신화일 뿐, 신과 인간을 섞어놓은 <십만왕국>은 제미신이 자신의 역량으로 새로 만든 세계입니다. 특히 주인공 예이네와 밤과 어둠의 신 나하도스의 교류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의 접촉을 생경하게 보여줍니다.


<십만 왕국>에는 제미신의 대표작 <부서진 대지>만큼 사회 고발적인 메시지나 비유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질서를 뒤집어 그리는 시도는 곳곳에 보입니다. 예이네가 통치하던 국가 다르는 여자가 남자보다 약해서는 안 되는 나라였고(다르에는 다르 나름의 야만적인 문화가 있습니다), 혈통으로 사람들을 옥죄는 아라메리 가문조차 권력을 잡는데 성별이 문제되지는 않습니다. 작가는 현실 인종을 기묘하게 뒤섞어 <십만 왕국>의 인간을 빚었습니다. 피부색과 곱슬머리를 따로 두는 식으로요. 책 띠지에는 드라마가 나올 거라는데, 어떤 배우가 나와야 그럴듯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외에도 제미신다운 표현이 많아 즐거웠습니다. 새로운 작품에서 새로운 캐릭터가 이야기하는데도 이것은 제미신의 글이라는 느낌이 풀풀 풍깁니다. 시간이나 시점을 천연덕스럽게 건너뛰거나 속도감있게 사건을 쓰다가도 독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문장을 툭툭 던지는 등입니다. 두서 없는 중얼거림 같다가도 결말을 알고 다시 읽으면 모든 퍼즐이 맞아 떨어집니다.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공유합니다. 단락 자체는 시간을 묘사했을 뿐이지만 작품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순간입니다.


<부서진 대지> 이후로 제미신다운 글을 읽어 좋았습니다. <위대한 도시들>은 현실 뉴욕이 배경이라 한국 독자로서 100% 즐기지 못했습니다. 반면 모두에게 낯선 <십만왕국>은 그 낯섦을 즐기면 됩니다. 저처럼 <부서진 대지>를 읽은 후 제미신다운 글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 <부서진 대지>를 읽지 않았어도 장르에 속하지 않는 장르소설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십만왕국>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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