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 레빗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
빅히스토리를 좋아하시나요? 세상의 모든 기원을 담았다는 벽돌책을 휘리릭 넘겨보며 가슴이 뛰어본 적 있으신가요? 한때는 저도 빅히스토리를 동경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담은 한 권의 책은 추상적인 나열이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다루는 시간이 방대할수록 초점은 희미해졌고, 벽돌책은 3장까지 가기도 힘들었습니다.
<우리 몸을 만든 원자의 역사>는 세상이 만들어진 역사를 다루면서도 빅히스토리의 함정을 피해가는 책입니다. 한국어판 책 제목에는 ‘역사’가 들어가지만, 연대기순으로 서술한 책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아주 작은 단위에서 볼 수도 있고, 덩어리로 뭉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책은 이러한 단위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원자와 쿼크에서 시작해 세포와 단백질까지 훑습니다. 우주의 기원을 묻는 질문이 화학을 거쳐 세포생물학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지식을 알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착각일 것입니다. 책에 나오는 지식을 ‘제대로’ 알려면 대학을 20년은 다녀야 할 것입니다.
지식 자체보다 과학자의 일화가 중심인 책입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지식이 과학자의 인간적인 열정에서 나왔음을 알게 됩니다. 과학자란 어린 제자의 무모한 실험을 말리다가도, 그가 발견한 사실에 최고 학술지에 다이렉트로 꽂아버리기도(!) 하고, 수십 번 되풀이한 실험을 자신도 믿지 못하고 논문에 자신 없는 주석을 달아놓기도 하니까요. 물론 책에는 범인의 열정을 아득히 초월한 집념도 가득하지만, 그런 일화도 '세상에 이런 일이!' 보는 기분으로 읽으면 재밌습니다.
수많은 인명과 용어가 휘리릭 지나는 책이지만 지식을 바라보는 저자만의 독특한 관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당대 과학자가 빠지는 사고의 함정을 여섯 개로 분류했고, 그중에서도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하다’, ‘전문가인 나도 지금까지 알아내지 못한 사실이 많은 것을 잊는다’의 사례를 강조합니다. 사람을 상대로 A/B 테스트를 해놓고도 잊혀진 비타민C 부터, 쓸모가 없다고 논문 투고를 거절당한 전자현미경까지. 사고의 함정은 비단 새로운 발견을 늦추었을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릴 기회를 앗아갔습니다. 이 시대의 과학자들도 2024년의 상식에 묶여 명백한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찰과 논리가 부디 상식을 뚫고 나오길 바라야지요.
과학을 전공했거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재밌게 읽을 책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책이 너무 방대해서 무슨 전공을 했든 모든 내용이 익숙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책에서 알게 된 몰랐던 사실은 삶의 다른 순간 개념이 등장했을 때 낯설지 않게 만들어 주겠지요. 반면 이미 알던 지식을 책에서 다시 보았을 때는, 그 지식이 어떻게 나왔는지 비화를 알게되어 재미있었습니다 (이중 나선을 밝히는 부분은 언제 봐도 안타깝긴 했어요. 제임스 왓슨은 제 마음속의 영원한 빌런입니다).
수많은 사례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자세를 논한다는 점에서,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는 과학에 관심이 있거나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한 분들께 마음가짐을 잡아줄 것입니다. 대학 입시 논술을 준비하던 과거의 저에게 주고 싶은 책입니다. 책의 범위가 넓다보니 근대과학의 어떤 지점 문제가 나오든 책을 기억해서 단서를 잇고(그 시절엔 지금보단 기억력이 좋았던 것 같아요), 지식 수준뿐만 아니라 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으니까요. 실험실에서 알아낸 결과가 두서없어 혼란에 빠진 연구자 분들에게도 위로가 될 책입니다. 지금도 실수와 모순 사이에서 분투하고 계실 모든 분들이 이 책에 나온 과학자들처럼 사고의 함정 사이에서 논리의 디딤돌을 찾아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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