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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Feb 19. 2024

신경을 잇는 고통

한강의『작별하지 않는다』 독후감

    절단된 손가락을 잇기 위해 삼 분에 한 번씩 상처 부위를 찔러 피를 내는 행위, 이것이 이 소설의 요약이다. 잘린 손가락을 포기했으면 고통은 훨씬 일찍 끝났을 것이지만, 끊어진 신경을 이어 손가락이 제 기능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 인선은 삼 주 동안 고행을 계속해야 했다.    


    인선의 사고는 ‘나(경하)’의 제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악몽에 시달리던 경하는 꿈에서 본 대로 통나무들을 땅에 심어 눈이 덮이면 그것을 촬영하자는 제안을 인선에게 했고, 인선은 선선히 수락했다. 하지만 ‘그 책’을 마친 경하는 어이없게도 ‘사적인 작별’을 당하고, 삶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는 바람에 그 프로젝트를 일찌감치 포기했다. 하지만 경하도 모르는 사이 인선은 이미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광주의 아픔을 꿈속에서도 끌어안고 있던 경하의 무의식이 인선에게 전달되었고, 인선에게서 광주의 아픔은 제주의 아픔으로 확장되었다. 

    잘려 나갔던 광주의 역사를 이어붙이려는 노력이 너무 고통스러워 경하는 삶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제주의 역사를 이어붙이려는 인선의 노력은 계속될 것임을 한강 작가는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게.”라는 인선의 말을 통해 암시한다.      


    통나무 다듬는 작업을 하다 전기톱에 손가락이 잘려 ‘그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고통을 느끼며’ 트럭에 실려 가던 인선은 경하의 책에서 읽었던 구절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광주의 고통을 상상한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 나간 사람들 말이야.”

 

   인선의 공감은 광주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면서 제주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기도 했다. 인선의 어머니 정심은 4‧3 사태 때 어린 동생을 잃었고 오빠는 빨갱이로 몰려 잡혀갔다. 오빠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어린아이다운 농을 한 것에 대해 후회 가득했던 정심이, 오빠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다 오빠와 같은 감옥에 수감되었었다는 남자를 만나 낳은 딸이 인선이었다. 치매에 걸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퇴행한 정심이 인선을 동생으로, 언니로 착각하고 때로는 도와줄 사람인가 여겨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오롯이 인선 혼자서 감당하면서 엄마의 과거를, 엄마의 악몽을 공유했다.    

    인선은 악몽이 무서워 꿈을 꾸지 않으려고 요 아래에 실톱을 깔고 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후 경하의 글을 통해 고통당한 혈육들의 아픔과 엄마의 한을 비로소 공감하게 된다.  


    경하와 정심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경하가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쓰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우울 모드가 가족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집필실을 따로 마련하였지만, 가족들은 경하로부터 스며 나오는 죽음의 냄새를 견딜 수 없어서 그녀를 떠났다. 정심 역시 자신의 악몽이 딸의 영혼을 어둡게 할까 봐 안간힘을 썼지만, 아이는 엄마를 떠나려고 했다. 이 이야기는 국가폭력을 겪은 사람이나 그것을 기억하려는 사람 모두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함을 보여준다.  


    경하의 남편이 ‘반쯤 넘어진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다’며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난다’라고 한 말을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글쓰기와 생활을 병행하려고 안간힘을 쓴 경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남편이 보기에 경하는 반쯤 넘어진 사람, 즉 반쯤 죽은 사람이었다. 작가적 양심으로는 기억하는 글쓰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기억하는 글쓰기는 그녀의 삶을 ‘그 도시’의 거리만큼이나 황량하게 만들어버렸다. 가족을 되찾기 위해 글쓰기를 포기할 수도 없었고, 글쓰기를 포기한다고 해서 가족의 삶이 되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경하는 그냥 삶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경하를 다시 삶으로 이끌어 낸 것은 인선을 통해 연결된 정심의 고통이었으니, 감히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려는 시도가 우리를 죽게 하지만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것도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스천은 기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순절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는 기간이다. 크리스천은 예수의 고난과 더불어 세상의 고통을 기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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