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게 있으면 엄마한테 물어봤던 것 같은데, 이젠 엄마보다 제가 더 아는 게 많은 대역전의 시대가 되었어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거의 스스로 해결하고 있어요. 많은 것을 ‘혼자력’으로 수습하며, 독립하여 사는 제 가족은 결국 저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분명 저에게는 번듯이 살아있는 가족 구성원들이 있는데도 말이에요. “나의 가족은 결국, 나”라는 생각은 저를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공포심을 느끼게 하지만 결국은 그 덕에 스스로를 더 사랑하고 책임감 있게 만드는 것 같아요.
간혹, ‘혼자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 있을 땐 엄마도, 아빠도 아닌,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묻고 싶어요.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아버지를 낳고, 그 막내의 막내 손주인 저를 끔찍이 귀여워하셨죠. 작고 강인했던 여성. 비녀가 꽂힌 5:5 가르마로 정갈하게 빗겨진 흰 머리, 화려하지 않은 옷을 입고 제가 다니던 중학교 앞 벤치에서 매일같이 절 기다리던 사람. 아버지는 할머니가 아빠를 낳으셨던 그 나이에 엄마를 잃었죠. 제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무렵, 저에게 최초의 ‘어른’은 할머니였어요. 제가 어릴 적 이미 할아버지는 풍을 앓고 계셨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그저 엄마가 돌봐야 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가족 집안의 ‘어른’은 할머니였던 거예요.
그래서일까요? 해답이 필요한 삶의 많은 문제에 직면했을 땐, 할머니가 저절로 떠올라요. 할머니라면 정답을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그럴 때마다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길 바라며 잠에 들곤 합니다.
할머니. 저는 요즘 유독 '진실과 거짓’에 관해 생각해요. 과연 이 세상에 ‘진실’은 있을까요? ‘진심’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진실’은 존재할 수나 있는 건가요? 개개인의 미소 뒤에 가려진 진실로 이 사회는 탁해져 가는 것 같아요. 그나마 진실이 있다고 믿는 순수한 어린양들이 호구처럼 당하고 뒤통수 맞고 상처받는 시대에 전 살고 있어요.
거울을 들여다봐요. 저 또한 매일매일 '진심'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나? 라고 자문해보면 대답할 수가 없어요. 저를 포함한 제 주변의 모든 이들이 과연 진실만을 말하며 살고 있다 할 수 있을까요? 진실만이 있는 세상은 물론 불가능하겠죠. 제가 그걸 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많은 곳에 진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고 매스꺼워져요. 진실은 언제부터 어떻게 사라진 걸까요?
올해는 유난히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많이 했어요. 다양한 의미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는데요. 원래 알았던 사람들도 유달리 올해엔 새롭게 느껴졌어요. 어쩌면 ‘진실’이라는 의미에 꽂혀서 그들을 판단하려 했던 제 오만함 때문일 수도 있어요.
생각해보면, '예술'이라는 바다 위, 전 매년 불안과 안정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다가 결국 불안 쪽으로 웃으며 건너가는 사람인 것 같아요. 작업을 할 때만큼은 ‘진실함’을 유지하려 애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함께’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저에게, 제 주변에 진실이 조금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절망적입니다. 왜 요즘 이런 생각들이 저를 지배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이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아요.
제가 처음으로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할머니. 어릴 적 나의 가족을 생각하면 대가족이었는데, 이젠 제 가족의 유일한 사람은 저라고 말할 수 있으니, 소가족 중에도 완전 소문자 소가족이네요. 물론, 이 말을 멀쩡하게 살아있는 우리 가족들이 듣는다면 섭섭할 테지만요. 그런데 이 사실은 그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할머니가 계신 곳엔 ‘진실’만이 있나요? 아니면 이곳과 별반 다르지 않는 세상인가요? ‘진실과 거짓’에 대한 해답을 알고 계신다면 꿈에 나와 알려주세요. 언젠가 ‘진심’이 닿아 ‘진실’이 느껴지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때 자신 있게 제 가족이라 소개하고 싶어요. 제가 기억하는 정갈한 모습으로 그곳에서 절 응원해주세요.
할머니의 평안을 기원하며
할머니가 상상할 수도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막내 손녀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