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작가 미상』 후기
작업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 한참을 캔버스 앞에서 앉았다 일어섰다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하던 어제, 가장 좋아하는 화가라서 감히 쉽게 볼 수 없던 영화를 드디어 꺼내 보았다.
『작가 미상』[1]
제목부터 불확실함과 미스테리함을 드러내는 이 영화는 나의 최애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일대기를 역사적 맥락과 함께 다루고 있다. 3시간의 러닝타임을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플레이 한 순간부터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온전히 집중하며 보았다. 영상이 그림 같았고, 그림 같은 영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와 같은 직업을 가진 나 같은 화가가 명심해야 할, 혹은 무릎을 팍 치게 되는 명대사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씬들이 즐비했다.
리히터에게 감동과 존경의 마음을 느낀 것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크게 기억 나는 순간은 세 번 정도로 압축된다.
첫 번째는 2007년, 독일의 뒤셀도르프 k20(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실물로 영접했을 때.
두 번째는 2011년 뉴욕의 필름포럼이라는 영화관에서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Gerhard Richter Painting』[2]을 봤을 때.
그리고 마지막을 꼽자면 예술가로서의 리히터 인생을 다룬 영화 『작가 미상』을 본 어제이다.
『Gerhard Richter Painting』이 이미 잘 알려진 예술가가 된 후의 작품에 집중한 이야기를 다뤘다면, 『작가 미상』은 그가 예술가가 되는 과정을 리히터라는 개인의 삶에 들어가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는 수많은 명대사와 인상 깊은 장면들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단연코 그가 작품에 임하는 태도와 눈빛이었다. 아마 그런 연유에는 평범치 않았던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졌던 그의 경험과 기억, 더불어 리히터의 가능성을 보고 질문해 준 선생(무려 요셉 보이스[3]) 덕분이었을 것이다.
리히터는 줄곧 '진실'에 관해 물으며,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끄집어낸다.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시상식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창의적인 것이다.”라며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의 말을 인용했다. 개인적인 것이 창의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을 이해시키고, 공감시키려면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즉, 영화와 같은 상업적인 예술을 포함하여 내가 하고 있는 회화(순수예술)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좋은 예술은, 나의 경험과 동시대의 관계를 잇거나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스스로 답을 내려본다.
리히터라는 한 개인의 삶을 다룬 이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 발란스를 맞추어 맛있게 믹스하는 것은 빈 캔버스 앞에 설 때의 순간과 비슷하다. 흥분과 막막함이 공존하는 순간.
그리고 창작자의 태도에 대해 생각한다. 결과값은 상관없다. 결과물이 가볍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아닌 것은 아니다. 작품에 임하는 태도, 그러므로 과정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얼마나 고민하고, 질문하며 작품을 만들었는가?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한가?에 대한 문제다. 나와 같은 애송이도 그럴 거고, 아마 (감히 예상해보건대) 리히터와 같은 능숙한 페인터도 이 고민과 질문은 여전히 할 것이다. 적어도 올바른 자세를 가진 예술가라면, 나이와 세대, 국적을 불문하고 창작에 임하는 자세와 고민, 태도는 비슷할 거라고 생각한다.
어제 세 번째로 느낀 리히터에 대한 감동을 간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언제 또 휘발될지 모르므로, 앞으로 작업하면서 태도가 무너지거나 게을러질 때, 이 영화를 꺼내어 보면서 두고두고 기억하려 한다.
영화『작가 미상』후기
[1]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Florian Henckel-Donnersmarck) 감독 작품, 2018.
[2] 코리나 벨츠(Corinna Belz) 감독 작품, 2011.
[3]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개념 미술, 플럭서스 등을 이끈 독일의 미술가, 교육가, 정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