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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 Sep 03. 2019

마담 스트레인저

베르트 모리조와 함께 길을 잃다



  나는 오르세에서 베르트 모리조를 처음 마주쳤다.


  그때 나는 오르세의 1층에서만 세 시간을 걸어 다닌 탓에 완전히 지쳐 있었고,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라도 쉬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1층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을 하기에 가장 좋다는 가을이라 그런지 나를 포함해 관광객이 지겹게 많았다. 사람에 치이며 올라온 2층에서는 듣지도 못했던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Berthe Morisot (1841-1895)". 그림 한 점 없이 전시의 입구를 장식한, 단출한 이름이었다.


  사실 베르트 모리조의 이름을 들은 게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1층에 있던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발코니>에서 그는 암갈색 눈동자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상주의의 홍일점, 마네의 제비꽃 여인. 오디오 가이드 속의 목소리는 베르트 모리조를 화가 대신 마네의 뮤즈로 설명했다. 그게 그의 그림보다 중요하다는 듯이.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발을 들였을 때, 모리조의 그림들은 날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낯선 사람에게 반응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그제는 인스타그램으로만 대화를 나눴던 프랑스인 친구와 만났다. 한국어를 못하는 프랑스인과 프랑스어를 못하는 한국인은 둘 중 누구의 언어도 아닌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내가 프랑스의 인종차별에 대한 주제를 꺼내자, 친구가 말했다. "대부분의 프랑스인이 이방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몰라." 낯선 사람, 이방인, 스트레인저. 재미있게도 그 말을 듣자마자 내가 느낀 건 고립감이었다. 나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인데도 그랬다.


  나는 이방인이 되어본 적이 없다. 세상은 나에게 불친절할지언정 낯선 곳은 아니었다. 스물몇 해는 분명 짧은 기간이지만, 세상에 익숙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게다가 한민족을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나라에서 토종 한국인인 내가 이방인이 될 일은 없었다. 나는 인종차별과 혐오 발언에 진저리 치면서도 지하철에 흑인이나 백인이, 히잡을 쓴 사람들이 타면 무심코 흘끔이는 사람으로 자랐다. '우리'가 아닌 사람, 나에게는 낯선 누군가, 이방인을 알아차릴 줄 아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내가 그 이방인이다. 지하철을 타면 열 명 중 여덟 명이 내 얼굴을 쳐다본다. 마트에서 물건을 계산하는데, 백인 남자가 낄낄대며 말을 걸다가 간다. 개찰구에서 캣 콜링을 하는 백인 남자 무리를 피해 도망친 적도 있다. 길을 지나가면 어린아이들이 나를 올려다보고 신기하단 표정을 짓는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렌느에는 동양인이 많지 않다. 이 곳에서 나는 내 이름이 아니라 아시안으로, 마담 스트레인저(Madame Stranger)로 존재한다. 베르트 모리조가 그의 이름 대신 마네의 제비꽃 여인으로 소개되었던 것처럼.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들은 서늘하다.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는 것과 달리 그의 색채는 따뜻하거나 온화하지 않았다. 순간을 잡아낸 러프한 붓질 위로 덜 다듬어진 날카로움이 감돈다. 그가 잘 사용하는, 붉은 기가 섞인 푸른색은 장면 전체를 어딘가 불안하게 만든다. 한편 풍경 속에 모델이 녹아들곤 하는 인상파의 그림들과 달리 모리조의 그림 속 여자들의 눈동자는 선명하고 선연하다. 나는 미소도 슬픔도 없는 얼굴에서 이방인의 표정을 읽는다. 까닭 없이 날 선 눈동자엔 낯선 세상 속에서 유리된 순간의 아연함이 있다.






  부유한 상류층 집안에서 백인 여성으로 태어난 베르트 모리조의 삶과 나의 삶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19세기에 여류 화가로 살아갔던 베르트 모리조의 감정과 지금 내가 낯선 땅에서 느끼는 고립감은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베르트 모리조도 어느 오후, 나를 희귀한 동물 보듯 보는 사람들 앞을 지나가기 위해 날 선 표정을 지었을까? 동양인이나 여자, 이방인이라는 범주에 묶이는 대신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발버둥 쳤을까?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버둥거려야 하는 여자들을 어떤 기분으로 그렸을까.


  프랑스에서도 저녁은 온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돌아오면 나는 늘 베르트 모리조가 그린 눈동자들과 눈을 마주친다. 불안정하고 낯선 세상 속에서 나를 응시하는 눈을 본다. 이상하게도 그 불안한 눈빛이 내게 용기를 준다. 어쩌면 나는 나를 이방인이라고 부르며 하는 위로 대신, 함께 길을 잃어줄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베르트 모리조와 함께 길을 잃는다.

  우리는 마담 스트레인저, 낯설고 이상한 여자들이다.

 



Berthe Morisot, <Jeune Femme près d'une Fenê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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