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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 Aug 09. 2020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나를 나답게 만드는 기억들



    누구나 사랑하는 기억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여섯 살 때 일이다. 그때 내가 살던 아파트 앞에는 나무 네 그루가 모인 넓은 그늘이 있었다. 나무 주변에는 녹색으로 칠을 한 철제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는데, 나와 친구들은 매일 유치원이 끝나면 그 울타리에 앉아있곤 했다. 그리고 나무마다 각자 이름을 붙여 자기 친구로 삼았다. 나는 내 단풍나무에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덟 살이 되어 동네를 떠날 때까지 그 아래서 자랐다. 단풍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잘근잘근 씹거나 나뭇잎을 모아 책갈피를 만들면서 말이다. 그 나무 그늘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여름이 내 최초의 기억이다.


    그런 순간들은 불현듯 떠오르곤 한다. 등굣길에 맡았던 라일락 향기나, 여름이면 꽃을 활짝 드리우던 하굣길의 장미 덩굴. 동생과 장갑을 끼고 나가서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던 겨울처럼. 저녁이면 우리 아파트에는 앞 건물의 긴 그림자가 졌다.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걸어가던 가을 나는 그 그림자가 딱 십 층까지 가린다는 것도, 그래서 십일 층에 사는 내가 책을 읽을 때 노을의 긴 빛이 내 책상에 미쳤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마 내가 아닌 누구에게든 이런 순간이 있을 것이다. 대단히 내놓지는 못할 일이라도 유독 온전하게 남아 잊히지 않는 시간 말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꽤 오래 행복이라는 말을 잊고 살았다. 행복하다고 말해선 안 될 때도 있었고, 정말로 행복이 뭔지 모르는 때도 있었다. 아마 그중에도 가장 힘들었던 때는 중학교 시절인 것 같다. 그때는 매일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운 삶이 터널 같다는 말은 틀렸다. 터널에는 언젠가 빠져나갈 거라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우울에는 출구가 없다. 매일 더 깊은 굴속으로 발이 빨려 드는 기분이었다. 내일은 결코 오늘보다 좋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은 언제나와 같은 하루였다. 중학교 때 나와 같이 하교를 하던 친구는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를 불었고 나는 수업이 끝나면 별관 음악실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곤 했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음악실로 향했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복도는 누가 불을 껐는지 어둑했고, 별관에서는 음악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친구가 있는지 확인하려 창 너머를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안에서 연주가 시작됐다. 바이올린 한 대, 첼로 한 대.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탱고. 그 곡의 제목이 <Por una cabeza>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나는 여전히 그 순간의 모든 장면을 기억한다. 갑자기 연주가 시작되어 깜짝 놀라 창문 아래에 주저앉았던 것도, 그새 해가 지면서 어두운 벽에 저녁놀이 물들었던 것도, 방해가 될까 들키지 않게 몸을 웅크린 채 앉아있던 것도, 그렇게 연주가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것도. 연습이 일찍 끝났다며 친구가 나를 찾으러 음악실로 왔을 때까지 나는 그러고 있었다. 그 후로 꽤 많은 영상을 찾아봤지만 그보다 멋진 연주는 들어본 적 없다. 아무리 대단한 첼리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라도 달랐다. 그렇게 숨 막히게 아름답진 않았다.


    못 견디게 슬프고 포기하고 싶은 날이면 그때의 연주를 떠올린다. 세상이 끔찍하다고 느낄 때 불현듯 나타났던 사소한 행복을. 이 순간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사실만으로, 내 삶을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기억을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이렇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나를 '나'로 만드는 건 이런 기억이다. 슬프고 괴로운 좌절의 기억도 물론 성장의 토양이 된다. 실패나 분노도 그렇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짓는 건 무엇을 사랑했는지다. 내가 사랑한 장면, 순간, 시간, 사람……. 나는 내가 사랑한 것들의 총합이다. 내가 사랑한 것들이 나를 나답게 만든다.


    분노와 슬픔은 자주 우리가 스스로를 잊게 한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사람은 쉽게 자신을 잊고 본래의 자기 자신보다 더 나쁜, 슬픈, 불행하고 끔찍한 누군가가 된다. 그렇게 감정에 휘말려 가까운 이에게 상처를 줄 때 정말로 상처 입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다. 내가 가진 좋은 것들을 외면하고 끔찍한 삶을 살기를 택한다는 게 우울의 맹점이다. 그럴 때일수록 내가 사랑한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사소하고 소박하지만 오직 내게만 있는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그건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다.






    삶에 아름다운 순간은 길지 않다. 수평선에 걸친 해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해는 중천으로 떠오르고, 아무리 좋은 노래더라도 삼 분이면 끝이 난다.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 청춘은 화려하지 않다. 삶은 대체로 뒤꿈치의 물집처럼 구질구질하고 퇴근길 지하철만큼 눅눅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한 것들을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동생, 엄마, 아빠, 친구들과 가족들. 장미와 라일락과 프리지어, 비가 많이 내리다 갠 날의 일출과 노을이 지는 나무 그늘, 밤이면 땅에 떨어진 별처럼 보이는 가로등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바람을 따라 누워서 자란 활주로의 풀, 파도가 칠 때마다 조약돌 구르는 소리가 나던 니스의 해안. 자우림과 새소년과 슈만의 음악, 모리조의 그림 앞에 앉아 보냈던 파리의 가을을.


    이제 나는 불행이나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애써 삶을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하는 것들을 만들고 되새기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불운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나는 나일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는 사람일 것이다. 몸이 좀 아프거나 취업이 늦거나 지금보다 가난하더라도 내가 사랑한 기억들은 그대로일 테니까. 내 삶은 잠시 고꾸라질지언정 아주 엉망이 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나다운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쓴다. 그리고 그건 제법, 사소하지만 도움이 된다.



* 본 글의 제목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일(A Small, Good Thing)』(1980)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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