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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 Jan 14. 2021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가능성의 불변성

저주를 푸는 단 한 사람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포스터


    상실 이후의 인간은 항상 문학의 주 관심사였다. 완료될 수 없는 슬픔을 읽고 쓰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삶이 계속되는 한 슬픔은 완결되지 않고, 완벽한 치유나 완전한 봉합 따위는 없어서 우리는 계속 이야기한다. 모호한 슬픔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이야기를 짓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여기 유품이 된 삶이 있다. 잃어버려선 안 될 것들까지 함께 치워버릴까, 먼지를 털 엄두조차 내지 못해 잡동사니가 쌓인 인생이 있다. 먼지가 겹겹이 쌓여 원래 지키려던 것이 무엇인지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무대는 상실로부터 말미암은 먼지 구덩이에서 시작된다.





잡동사니 상자의 여자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주인공인 엠마는 낡은 잡동사니 상자 같은 집에 스스로를 가두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독거노인이다. 그는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살아간다. 엠마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자신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일방향 매체인 텔레비전뿐이다. 그의 인생에는 더 이상 타인과 주고받는 목소리가 없다. 그렇게 종일 텔레비전만 보던 엠마의 삶에 어느 날 누군가 초인종을 울린다.


    불현듯 찾아온 방문객은 자신의 이름이 스톤이라고 밝힌다. 스톤은, 본인의 말에 따르면, 정부에서 독거노인 복지를 위해 파견한 가정용 인공지능 로봇이다. 그는 엠마의 동의 없이 그의 건강을 위해 커튼을 열거나 요리를 하고 빛바랜 물건들에서 먼지를 털어낸다. 스톤이 성실한 노동의 대가로 요구하는 건 고작 말 한마디다. “땡큐!” 그러나 밤에도 불이 켜지지 않던 집에 전등이 켜지고 음악과 영화 소리가 울려 퍼지기까지도 엠마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땡큐라고 말해달라는 스톤에게 윽박을 지르기 일쑤다. “고맙다는 그 말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그냥 땡큐 그 한마디면 되는데.” 그렇게 스톤의 푸념과 함께 이야기는 엠마가 감사에 인색해진 이유를 찾아 흘러간다.


    젊은 시절 엠마에게는 사랑스러운 딸과 남편이 있었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가정에 균열이 생긴 건 딸인 미아와 남편 스톤이 함께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였다. 미아가 목숨을 잃고 스톤은 장애를 얻은 사고 이후로, 엠마는 딸을 잃은 슬픔에 남편을 돌아보지 못한다. 그 결과 스톤은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하고 만다. 엠마가 누구도 들이지 않으며 보존한 집은 미아와 스톤의 유품이었다. 스톤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과 미아를 잃은 슬픔으로 모든 것을 잊고도 슬픔에 머물러 있는 엠마의 인생처럼 말이다. 남편과 이름이 같은 로봇 스톤이 작동을 멈추면서부터 엠마는 그 모든 기억을 떠올려낸다. 그리고 스톤 없이 홀로 집 밖으로 걸음을 뗀다. 그는 집을 나와 처음으로 만난 이웃이자 엠마를 걱정해 줄곧 말을 걸어왔던 청년 버나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땡큐.”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중, 아트인사이트 제공


    이처럼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망각에 갇혀 살아가던 엠마가 로봇 스톤을 만나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극이 시작할 때의 엠마는 죽을 날만 기다리며 자신을 도우려는 로봇에게 독설을 서슴지 않는 비관적인 노인이지만, 결말부에서의 그는 낯선 주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한다. 이렇듯 그를 변화시킨 것은 로봇 스톤이 쓰러지며 기억해낸 비극이 아니다. 엠마를 바꾼 건 스톤과 아름다운 추억을 반추했던 시간, 레이스 숄을 걸치고 빨간 구두를 신은 채 춤을 추었던 순간이다. 늦은 새벽 스톤의 손을 잡고 함께 문밖으로 나섰던 때의 경험이다.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엠마는 관성화된 우울에서 차츰차츰 벗어난다. 그리고 스톤이 사라진 후에도 홀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이러한 엠마의 모습은 우울감에 길들여진 사람이 어떻게 불행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때로 사람들은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밤거리를 걸어줄 한 사람이 없어 불행해진다. 그리고 반대로 곁에 있어주는 한 사람이 있어 다시 세상에 뛰어들 용기를 내기도 한다. 로봇 스톤은 엠마에게 바로 그 한 사람이었다. ‘땡큐’라고 말하지 못해도 입을 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말이다. 그렇게 누구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이해해주지 않았던 괴팍한 독거노인은 다시 엠마라는 이름의 사람으로 돌아온다.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예고 영상 중


    사람 사이의 관계는 위태롭고 위험하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입히고 받으며 함께한다. 엠마가 미아와 스톤으로 인해 얻은 슬픔도 그런 상처였다. 그러나 상처 받더라도 서로를 인식하고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나’의 존재를 정립할 수 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곧 타인과의 관계이며 타인이 없이는 자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도 바라봐주지 않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삶은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더는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타인을 거부하는 엠마의 삶도 그렇다. 그는 마치 본래의 모습을 잃는 저주에 걸린 것처럼 자신마저 잃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엠마가 삶의 의욕을 되찾는 이야기이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내는 이야기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고르자면 전래동화 <미녀와 야수>를 들 수 있겠다.


    저주라는 상처로 세상을 거부하고 고립되어 살아가던 야수의 마음을 벨이 풀어냈듯이, 스톤은 엠마의 인생에 불쑥 들어와 그의 저주를 풀어낸다. 이런 전통적 구도가 의의를 갖는 것은 저주를 해소받는 당사자가 노년 여성이라는 데에 있다. 노인은 일반적으로 누구도 더는 성장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더 이상 바뀌지 않는 존재, 소위 ‘꼰대’에 고집불통인 캐릭터로 다루어지곤 했다. 특히 노년 여성은 사회적 최약자로서 문학의 틀에서조차 끝없이 외면당해왔다.


    그러나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에서는 다르다. 노년의 여성인 엠마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뮤지컬은 누구든 변화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나이가 몇 살이고 어떤 삶을 살았든 우리에게는 항상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건 손을 내밀고 보폭을 맞춰줄, ‘땡큐’라는 말 한마디가 부족해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저주를 푸는 단 한 사람이다.     





창살 속의 엠마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중, 아트인사이트 제공


    무대 연출의 측면으로 들어가 보자.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에서는 격자무늬를 주된 심상으로 활용한다. 스톤이 창문을 열고 닫는 시늉을 할 때마다 무대에는 격자무늬의 그림자가 오간다. 주인공인 엠마는 노란색의 격자무늬가 있는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반대로 딸 미아의 환상은 보라색 격자무늬의 노란 원피스를 입는다. 이러한 격자무늬는 창살의 은유로 끝없이 활용된다. 엠마를 상징하는 색이자 극에서 우울을 표현하는 색상인 보라색은 미아를 사라지지 못하게 가두는 창살-격자-이다. 반대로 엠마는 미아를 상징하는 색인 노란색의 격자무늬에 갇혀 있다. 이러한 격자무늬의 의상은 엠마가 미아라는 창살에 갇혀 있듯이, 미아도 엠마의 망각과 아집에 붙잡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극에서 의상을 통해 캐릭터를 조형하는 것이 비단 엠마와 미아만은 아니다. 도우미 로봇인 스톤은 집사복과 유사한 스타일의 조끼에 청바지를 입고 스니커즈를 신어 젊고 활기찬 도우미 로봇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엠마가 살고 있는 동네의 감시자이면서 엠마의 이웃인 버나드는 캐리어에 붙이는 스티커를 모자에 덕지덕지 붙이고 등장한다. 이러한 모자와 알록달록하고 유아적인 색상을 활용한 의상은 버나드가 유년에 멈춘 자아로 주변을 방황하는 캐릭터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또한 빨간 구두와 낡은 레이스 숄은 엠마의 긍정적인 기억을 형상화하는 중심 소품으로 등장한다. 엠마는 평범하고 낡은 원피스에 숄을 걸치고, 검고 무거운 단화 대신 빨간 구두를 갈아 신으며 자신의 내면이 변하고 있음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빨간색 구두는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와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 이후 ‘현실을 벗어나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길잡이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줄곧 어두운 색상의 의상을 착용했던 엠마의 의상에 더했을 때 극적으로 보일만큼 선명한 색상이기도 하다. 이렇듯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배우들의 의상을 활용해 캐릭터의 설정을 시각적으로 암시한다.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중, 아트인사이트 제공


    극은 빛과 그림자를 사용해 다양한 연출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스톤이 커튼을 열고 닫을 때면 창살 같은 창문의 격자무늬 그림자가 무대를 가로지른다. 미아를 상징하는 색이면서 긍정적인 이미지의 노란색은 스톤이 커튼을 들추는 잠시간 무대를 비추다가, 엠마가 커튼을 황급히 닫으면 보라색 혹은 푸른색으로 바뀐다. 스톤이 작동을 정지하는 장면에서는 극의 앞부분에서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새빨간 조명이 무대를 비춘다. 강렬한 붉은색의 조명과 사이렌처럼 윙윙거리는 음향은 순간적으로 관객들에게 위태롭고 당황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해낸다. 이처럼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디자인적인 요소를 사용해 극의 줄거리와 캐릭터의 설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에게 시각이라는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감각을 통해 설정을 전달하고, 물리적 한계로 재현할 수 없는 것을 무대에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물론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가 모든 면에서 훌륭한 뮤지컬은 아니다. 극을 보며 느낀 가장 큰 단점은 작품이 끝맺어진 후에도 전개를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전조나 설명도 없이 불현듯 작동을 멈추는 스톤이나 갑자기 기억을 떠올리는 엠마, 맥락 없이 ‘변화는 위험하다’ 고만 주장하는 버나드 등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사건에는 다수 이유가 부재되어 있다. 등장하는 물건과 사람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하지만 그 개성을 관객에게 영 설득해내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후반부에서는 스톤이 사실은 죽은 남편의 계획으로부터 만들어진 로봇이라는 점을 암시하지만 이것조차 사실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엠마의 남편과 똑 닮은-남편의 말버릇과 성격을 재현하는- 로봇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작위적으로 덧붙여진 설정이라는 인상을 남길뿐이다. 환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미아 역의 배우가 젊은 엠마를 그대로 연기하는 등 불친절한 연출 방식도 전개를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었다. 최소한 미아 역의 배우가 젊은 시절의 엠마를 재현할 때는 빨간 구두와 같은 소품을 활용해 캐릭터를 구분할 수 있도록 연출했으면 좋았으리란 아쉬움이 남았다.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포스터


“당신은 분명 변할 거예요.”
“아니, 나는 변하고 싶지 않아…….”


    극의 도입부에서 스톤과 엠마는 서로에게 이렇게 노래한다. 처음 결코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엠마의 고집은 스톤과의 나날을 거쳐 점차 무뎌진다.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슬픔 속에 머무르겠다고 다짐하던 엠마는 빨간 구두를 신고 한 걸음씩 자신을 가둔 창살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렇게 ‘당신은 분명 변화할’ 거라던 스톤의 예언은 기분 좋게 실현된다.


    결과적으로 이 극은 우리에게 성장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남들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인간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한다. 삶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유품처럼 여겨야 하는 슬픔이 있더라도 결국 상처는 아물고 우리는 흉이 진 마음으로도 살아간다. 그러므로 사회가 포기하거나 소외해도 좋은 존재는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신을 찾아와 줄 스톤 없이 고립되어 살아가는- 그래서 변화하지 못한 엠마가 무수히 많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타인의 ‘스톤’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함께 하는 존재가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에게 스톤과 같은 존재가 될 때 소외되었던 사람들은 비로소 다시 문밖으로, 세상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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