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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 Mar 31. 2021

<소년이 온다>와 애도적 글쓰기

1980년 5월 18일 광주


출판사 <창비> 제공 이미지 (출처: https://twitter.com/changbi_books/status/1258305062062813187)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는 1980년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소설이다. 동시에 2014년 4월이 지나 출간된 소설이면서 2009년을 보내고 태어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9년 1월의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한강이 중얼거린 말에서 『소년이 온다』는 시작된다. "저건 광주잖아." 그에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18일 일어난 광주 민주화 운동은 오랫동안 진실을 은폐당하며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항쟁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광주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말들은 지속적으로 전파되었다. 간첩의 개입이라는 소문부터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저열한 거짓말은 한 차례 훼손되었던 도시의 존엄을 공격했다. 그렇게 고통은 완결 지어지지 않은 사건으로 남았다. 그리고 광주가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무수히 많은 광주가 다시 태어났다. 제주에서, 용산에서, 진도에서. 권력으로 인해 억압되고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혀서 훼손된 것, 그러나 훼손되어서는 안 됐던 것들이 말이다. 그래서 한강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도 30여 년이 흐른 때에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 전남대생들이 공수부대와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에 분개한 시민들은 다음 날 거리로 뛰쳐나왔고, 20일 자정 공수부대는 그런 시민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 5월 21일에는 계엄군이 시민을 대상으로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21일 이후에도 광주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계엄군을 광주시 외부로 몰아냈으나 22일 광주시 전역이 군대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고 봉쇄되었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27일 새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 들이닥쳐 시민군을 살상했다. 그날 사십만이 살고 있는 도시를 짓밟기 위해 군인들에게 지급된 탄환은 모두 팔십만 발이었다. 그리고 『소년이 온다』의 이야기는 사건이 발생한 5월 18일을 대신해 21일부터 시작된다. 광주에서 집단적인 죽음이 발생한 순간, 즉 계엄군이 시민들을 살해한 순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고귀한 신념과 피 끓는 투쟁이 아니라 죽음의 냄새를 먼저 포착한다. 여섯 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소설은 유령들의 목소리로 서두를 연다. 중학교 3학년인 주인공 동호는 친구인 정대와 함께 시위대에 휩쓸렸다가 총에 맞은 친구를 찾는 과정에서 도청에 방문한다. 그리고 거기서 피살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기록하는 일을 맡는다. 작가의 시점에서 '너'로 호명되었던 이 어린 새의 이야기는 2장에서 유령의 입을 빌려 이어진다. 군인들에게 먼저 학살된 동호의 친구 정대는 유령이 되어 동호를 지켜본다. 그의 독백은 계엄군에 학살된 시민이 어떻게 버려졌는지를 서술하다가 동호의 죽음을 감지하며 끝이 난다. 여기서 정대의 혼은 잔인하게 살해되어 버려지는 시신의 모습을, 운반되고 겹겹이 쌓여 자신의 몸이 썩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화자인 유령은 죽음 이후의 평온이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고깃덩어리처럼 던져지고 쌓아진 자신의 몸을, 썩어가던 얼굴을 증오한다고 말하며 분노하는 존재이다. 또한 물성으로 인해 썩어가는 육체와 자기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환상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듯 비현실적 화자의 목소리와 현실의 사건이 교차하는 순간은 우리에게 불변하는 역사로만 인식되었던 5월의 광주를 불확정의 세계로 변모시킨다. 독자가 알고 있던 역사 속의, 강제로 체계화되고 종료되었던 광주에 환상성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억압되었던 시간은 비현실적 화자의 입을 빌려 묘사되고 재현된다. 여기서 현실의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자신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물론 계엄군이 빼돌려 매장하는 시신들을 끝까지 지켜보고 묘사하는 것-을 결심하는 영혼은 이성 중심의 시공간을 뛰어넘는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 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정대의 영혼은 계속해서 그날의 사건을 목도하기를 다짐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살해당한 순간을 되뇐다. 단순히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는 통계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 그 죽음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모욕적이었으며 참혹했는지를 기억한다. 썩어가던 옆구리와 살을 관통한 총알, 구멍으로 흘러나가던 피, 탄환을 쏘아낸 총구와 방아쇠를 당기던 사람의 눈동자 같은 것들을. 그리고 정대의 유령은 이렇듯 자신의 죽음을 기록함으로써 목소리를 목격하고 있는 독자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알고 있던 것은 정말 전부였는지, 고정된 현실이며 종료된 사건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로 완결되었는지 말이다.


    이렇듯 실존하지 않는 화자의 목소리는 실존하는 사건과 병합되어 그간 우리가 인식하고 있었던 통시적·거시적 사건으로서의 광주를 해체한다. 그것은 결국 현재적이고 개인적인 사건으로서 광주를 재현하는 과정이다. 역사가의 논리가 아니라 개인의 목소리로 희미한 윤곽을 더듬어내는 손길이다.






    한편 3장의 주인공인 은숙은 ‘광주 이후’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그는 음식 앞에서 허기를 느끼는 자연스러운 일조차 치욕으로 느끼며 자신의 생명이 빨리 끊어지기를 소망한다. 그에게는 살아남았으며 계속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지는 생존 욕구조차 스스로 수치스러워할 일이다. 은숙이 자신의 생존욕을 혐오하는 것은 오래전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해서 사람들이 죽고 쓰러지고 모욕당하던 광주에서 살아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광주의 그림자 속에 남아 살아남은 자의 수치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그래서 은숙은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 된다며 항의하고, 가볍고 보드라운 눈발을 보며 그것들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광주는 여전히 광주이며 광주에서의 모든 사건은 지속 중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광주 이후로 규정짓는 것은 곧 광주의 사건이 완전히 종료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은숙에게 광주항쟁은 여전히 실존한다. 소설은 은숙의 삶으로 광주의 지속성을 비추어내면서 결과적으로 광주를 계속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한다. 광주는 지속되고 있고, 우리는 애도 완결 짓지 못했으며 심지어 모욕마저도 방지하지 못했기에 새로운 광주를 끝없이 탄생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은숙은 인간을 믿을 수 없고 일곱 번째 뺨을 잊을 수 없고 세상을 아름답게 여길 수 없다. 그에게 애도는 종료도 분리도 불가능한 것이며, 또 은숙 자신이 계속 그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후 연구자의 입을 빌려 재언급된다.  


    저는 그 폭력의 경험을, 열흘이란 짧은 항쟁 기간으로 국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르노빌의 피폭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몇 십 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허락된다면 앞으로 십년 후에도 후속 논문을 쓰려합니다.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소년이 온다』에 등장하는 누구에게도 광주는 완결된 사건이 아니다. 광주에 가해졌던 폭력은 열흘간의 항쟁 기간으로만 요약될 수 없다. 고문 피해자였던 진수는 군인들과 고문관들에 대한 원한으로 십 년을 버티다가 자살을 택한다.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고 피해자는 호명되지 않으며 광주의 그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흐려지는 세상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이젠 지쳤다"라고 말하는 그에게는 삶을 부지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우울과 무력감이 있다. 그날 광주에서 살해당한 이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족이고 친구이며 형제이고 이웃이었다. 그래서 한번 거대하고 억압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던 경험은 피폭의 흔적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함께 살아남았다. 학살 이전의 세계는 없다. 우리는 그 여름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작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를 내어놓기 전 했던 인터뷰에서 “질문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라고 밝힌 바가 있다. 자신에게 소설이란 세상의 질문에 답하거나 용서와 화해, 평화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질문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가관을 통해 『소년이 온다』가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죽거나 죽지 못한 유령들의 목소리가 불러오는 것은 그간 피해자에게 요구되었던 용서와의 대립이며 애도의 종료와 망각에 대한 저항이다. 거시적 질서로 미시적인 기억들을 억압하고 끝맺던 사회에 대한 질문이다. 이 사건은 종료되었는가? 우리는 광주를 끝맺을 수 있는가? 다시는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애도는 삶과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는 완료될 수 없는 애도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리는 애도를 완결 지을 수 없기에 상실을 반추하는 이야기를 쓴다. 애도는 끝나지 않고, 슬픔은 완결되지 않고, 완벽한 치유와 완전한 봉합 따위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기한다. 한강이 광주를 불러와 작품 속에 살려내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한강의 '애도하는 글쓰기'는 곧 육체를 떠나 방황하는 유령들을 붙잡는 일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2인칭의 호명을 유일무이하고 현재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3인칭과 달리 2인칭은 오직 한 사람, 화자인 내가 지칭하는 특별한 누군가를 가리킨다. 이러한 호명의 힘은 죽은 동호마저 어둠으로부터 떠올라 존재하도록 만든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어 비로소 꽃이 되었듯, 불특정 하던 희생자를 '너'라고 지칭함으로써 '내가 이야기하는 소년'으로 만드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인 장례 절차에는 초혼(招魂)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지붕에 올라가 이름을 세 차례 부르는 이 의식은, 호명하는 것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시 자신의 몸에 돌아오기를 바라며 시작되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가 떠도는 혼조차 불러들일 정도로 강력하고 유의미한 것이었던 셈이다. 한강이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 동호를 이야기하고, 그를 '너'라고 부르고, 몸을 벗어난 영혼에 주목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런 초혼 의식과도 같다. 짓밟히고 훼손되어 버려졌던 작은 몸은 호명되면서 망각의 어둠에서 떠오른다. 흑백의 사진 속 과거에 갇힌 소년은 그를 그리는 사람들로부터 재현되고 되살아난다. 죽으러 찾아갔던 광주에 네 사진이 있어서 죽을 수 없었다고, 그 분노가 나를 살렸다고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너의 장례를 치르지 못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고백으로부터. 그리고 여전히 죽음의 순간을 후회하며 소년이 꽃핀 쪽으로, 빛으로 걸어 나오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로부터. 거시적인 사건 속에서 불특정한 피해자 한 명일 뿐이었던 동호, 이성적 질서에 갇혔던 동호는 개인적이고 현재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이렇듯 소년을 이야기하는 행위는 떠도는 영혼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초혼이면서 사라졌던 존재를 복원하는 재탄생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자신의 시대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어둠을 지각하는 자라고 말했다. 빛 대신 어둠을 얼굴로 맞으며 펜을 암흑에 담그고 써내려갈 수 있는 자야말로 동시대인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동시대인이란 현재의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도리어 시대의 어둠을 보다 빛을 포착하는 자다. 그러므로 동시대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대의 중심적인 해석, 권력으로부터의 억압, 거시적이고 역사적이며 객관적인 것들과 불화를 빚으며 종료되지 않은 어둠을 새로이 해석해나가야 한다.


    한강은 포스트 모더니즘적 글쓰기로 시대의 어둠을 해석한다. 죽은 자와 산자의 말을 병치시키고, 살아남지 못한 삶과 죽지 못한 삶을 교차하면서 완결되지 않은 사건으로서의 광주를 재현한다. 이는 결국 살아남았건 그러지 못했건 그때의 5월 이후로 광주의 삶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애초에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애도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우리와 분리될 수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애도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초혼 의식으로서 나아간다.


    그러므로 『소년이 온다』는 곧 긴 애도이다. 통사적 질서 속에서 거시적인 역사 속의 사건으로 마무리 짓기를 강요하던 질서에 대한 반항이다. 모욕적이었던 죽음을 부정하며 영혼이 떠난 몸을 붙잡고 이름을 외치는 의식이다. 훼손되어서는 안 됐던 것들을 거대한 폭력이 어떻게 파괴했는지, 그래서 어떻게 우리의 삶이 장례식이 되었는지에 대한 증언이다. 소설은 완결되지 않은 사건으로서 광주가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재현하면서, 끝나지 않은, 잊히지 않은, 여전히 호명되고 있는 영혼을 붙잡는다.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던 얼굴을 들어 올린다.


    그러한 말하기를 통해 사람들은 돌아온다. 살아남았기에 죽은 이들과 대등할 권리조차 없는 치욕스러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온다. 흑백사진 속에 멈춘 얼굴이나 썩은 육체 혹은 굳어버린 텍스트를 대신해 사람으로서 온다. 소설이 기다리는 것은 이렇듯 우리가 현재적 사건으로서의 광주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잃어버린 이름을 호명하고 억압되었던 기억을 직시하는 순간이다. 억압적인 객관이 주관의 세계로 변모하는 때다.


    그리하여 희끄무레한 빛 속에서 소년이 우리에게 온다.





<참고문헌>

1. 기본 자료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2.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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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너'에서 '너들'로, '광주'를 되불러오기-한강의 '소년이 온다'. (2019).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31/20181231020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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