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프보다 박싱데이인 이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엄마 때문에 나의 크리스마스는 항상 교회 일을 하는 날이었다. 11월부터 미친 듯이 연습을 하고 이브에는 발표를 하고 당일날엔 성탄 예배를 드리는 삶... 20년 넘게 착실하게 이 루트를 지키다 요즘엔 그나마 덜 지키고 있는 사람이기에 도대체 남의 종교행사일에 왜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난리를 치는지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특히 언젠가부터 연인들의 날이 되어버린 건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한국의 크리스마스가 연인끼리, 친구들끼리 모이는 날이라면 이 곳의 크리스마스는 유독 가족 중심적이다. 크리스마스 당일이고 이브고 현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질 않더라! 나는 현재 처음 밴쿠버에서 얻었던 홈스테이 근처의 현지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한국인이 딱 한 가정뿐인 60여 명 규모의 작은 교회이다.), 무려 크리스마스 행사를 2주 전 수요일에 하더라! 기말고사가 있어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올라온 사진들을 보니 포토월 같은 걸 해놓고 담소를 나누기도 하는 그런 자리였던 것 같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 주일 예배를 드리더라. 기독교의 가장 큰 행사인 크리스마스이지만 교회에서도 당일은 가족들과 보내는데, 교회 밖은 어떠겠는가!
여기선 대부분의 음식점들이(특히 아시안 계열) 공휴일 당일에 문을 닫는데(아마도 직원들에게 1.5배의 수당을 줘야 하기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크리스마스 또한 마찬가지다. 게다가 이번엔 슈퍼마켓도 닫는다. 당일 스테이크를 해 먹고 싶은 마음에 현지 마트에 갔다가 닫힌 문을 보며 씁쓸히 돌아 나와 한인마트에 간 기억이 있다. 역시 아시안들은 어디서나 쉬지 않는다.
처음 블랙프라이데이를 기다릴 때 캐나다는 박싱데이(12월 26일)가 좀 더 할인율이 높고 블프에는 의외로 살 게 없다는 말을 듣고 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이 시기가 되니까 너무 잘 알겠다.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기 때문에 각종 상점에는 가족들 선물을 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현지 초콜릿 가게에서 판매직에 종사하는 지인의 말에 따르면 최근(이야기를 들은 게 12월 중순이었다.) 매출이 어마 무시하다고... 적게 사가도 180불 정도고 300불 이상은 많은 편도 아니란다. 하루 매출도 3~4000불 정도 된다고 하더라. 무엇을 살지 적은 리스트를 건네주는 손님들도 있는데 빼곡하게 적힌 리스트의 옆에는 할머니, 이모, 삼촌 등의 가족들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물론 가까운 지인이나 동료들도 챙긴다. 지난 일요일에 교회에 가니 작은 선물을 주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 27일에는 교회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서 다녀왔는데, 다른 친구가 카드를 주길래 생각 없이 열어봤더니 25불짜리 기프트카드가 동봉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시기이니 당연히 블프보다 박싱데이가 매출이 더 높고 할인율도 올라갈 수밖에.
게다가 박싱데이 또한 일반적으론 휴일이다(이렇게 쓰는 건 공휴일 적용이 안 되는 직군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 휴가를 잘만 낸다면 꽤 긴 기간 동안 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나 가게마다 쇼핑객들로 미어터지고 음식점들 또한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쇼핑을 했으니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건 인지상정이니!
블프 때는 일을 하느라 쇼핑 인파가 어느 정도인지 경험하진 못했다. 다만 일하고 있던 음식점의 런치타임이 미친 듯이 바쁘더라. 디너타임에 출근한 이민자 2세인 동료가 말하길, 현지인들은 주로 오전에 쇼핑을 하고 점심을 먹고 집에 간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런치타임이 오히려 미친 듯이 바빴구나!' 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하루 종일 일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 박싱데이는 백수였기 때문에 열심히 상점가 구경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하필이면! 일했던 곳에서 매니저가 스케줄을 잘못 짜는 바람에 그만둔 지 3주가 넘은 나에게 저녁에 일을 도와줄 수 없겠냐는 연락을 받아버렸다. 원래 같으면 당연히 안 하겠지만, 생각보다 일이 더 안 잡혀서 돈이 궁했던 터라 제안에 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왠지 박싱데이조차 구경을 못하면 좀 아쉬울 것 같아 일을 가기 전에 세 시간 동안 밖을 배회했는데, 확실히 인파가 많긴 많더라. 상점마다 평균 두세배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고 한방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다운타운 내 쇼핑의 끝판왕, 퍼시픽 센터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바글바글하다고 해도 한국인의 입장에선 별로 그런 편이 아니긴 하지만... 대략 주말 잠실역의 지하상가와 백화점 정도의 인파 정도였다. 아니 사실 그 정도까지도 안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박싱데이도 사실 건질 게 별로 없었다. 아무래도 이미 선물을 다들 구입하고 난 후 남은 제품들을 떨이하는 부분도 적잖이 있기 때문인지(이 글을 올리는 29일에도 낮에 잠시 퍼시픽센터를 다녀왔는데 대부분 박싱데이에 이어서 물건은 많이 빠졌지만 계속 세일 중이었다! 역시 최고의 쇼핑은 마감 떨이!), 내가 원하는 품목은 주력 상품들이어서 할인을 하지 않았고 딱 한 제품만 필요한데 buy one, get one 세일을 하질 않나, 특히 의류의 경우 이게 할인이 들어가는 건지 아닌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확인해보고 싶으면 한 번 구매해 보면 되긴 했을 테지만 맘에 드는 옷 찾기가 여간 쉽지 않은 데다가 겨우 찾아도 가격 대비 질이 떨어져서 지갑이 쉽게 열리진 않았다. 예전에 캐나다인 친구와 세일 기간에 함께 왔을 때에는 전 품목이 가격표의 반 값으로 할인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도 매장마다 다르고, 지금은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바쁜 직원을 붙잡고 매번 묻기도 그랬기 때문이다. 결국 소득 없이 나와 일을 하러 갔고, 꽤 정신없이 저녁 장사를 하고 집에 와서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지난 12월 17일, 쏠메와 함께 맥아더글렌 아웃렛에 가서 구두 한 켤레를 93불에 구입했다. 새 제품이 없어서 매장에서 주문을 넣어 집으로 배송을 받았고 그 때문에 메일 주소를 입력했는데 이것이 바로 화근이 될 줄이야! 메일 주소가 등록되어 있으니 해당 매장의 홈페이지에서 광고가 계속 날아들었고, 급기야 나는 보게 된 것이다. 박싱데이 50% 세일을! 물론 이미 50% 할인가에 구매한 상태라 싸게 구매한 편이었지만, 홈페이지의 할인가에서 50% 코드를 적용해보니 20달러가 넘게 더 싸지더라.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으련만! 원래는 쏠메와 함께 아웃렛에 재방문할 생각이었기에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친구는 현재 밴쿠버에 없기 때문에 갈 일이 없어졌다...
평소 같으면 아쉽지만 그냥 넘기거나 했겠지만 마침 신발은 신을 일이 없어서 아직도 미착용 상태였고, 나는 지금 돈에 굉장히 쪼들리고 있는 백수였기 때문에 20달러의 차액은 꽤나 큰 금액이었다. 반품 후 재 주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10달러 이상이 이득이니. 그래서 혹시나 싶은 마음에 홈페이지를 뒤져보다가 Price Matching이라는 제도를 발견하였는데, 주문한 지 열흘 이내에 가격이 변동이 된다면 차액을 돌려준다는 제도였다! VIVA! 마침 그 날이 딱 열흘째 되는 날이었기에 일단 새벽녘에 문의글을 올렸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 확인해보니 애석하게도 저 서비스는 자사 매장에서 주문한 경우 적용이 되지 않고(!) 홈페이지에서 주문한 고객 대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반품 기간이 60일(!)이긴 했지만 다른 볼일이 있지 않은 이상 아웃렛까지 가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20달러는 그다지 큰 금액이 아니기에 애석하지만 포기 상태이다. 역시 아무리 세일 기간에 건질 건 없다 하더라도 일단은 박싱데이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깨닫고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일 박싱데이 세일을 마무리하였다.
- 캐나다 밴쿠버에서, 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오후 9시 15분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