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오늘도 토요일이란 소리잖아 / 그렇다는 건
오늘 슈-퍼! / 세일하는 날이잖아!!!!
넷플릭스에서 인기 순위에 올랐던 애니메이션, 원펀맨의 3화에서 주인공 '사이타마'가 지너스 박사의 '아수라 풍뎅이'를 한 방에 뭉개버리며 내뱉는 '특별세일' 개그.
무시무시한 주먹을 가진 이 남자가 토요일 한정 '특별세일'을 놓쳐 분노했다는 설정은 싸움의 결정적 장면에서 쾌감을 더해준다. 그런데 이런 표현, 알고보니 괜히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물가 비싼 나라로 꼽히고, 여전히 세계 4위 경제 대국인 일본. 그런 일본의 중산층들은 정체된 임금, 상대적으로 높아져만 가는 물가에 한푼이라도 할인해주는 상품을 골라 사들이는게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 현지 편의점 음료 가격은 한국보다 400~500원쯤 저렴하고, 스타벅스 커피, 디즈니랜드 입장료도 이렇게 만만할 수가 없다. 어쩌면 코로나가 풀리면 부담없이 여행을 갈 수 있을만한 나라.
지난해 발간해 일본인들에게도 충격을 준 '값싼 일본'이라는 책의 인기와 함께 'Cheap Japan'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워크맨부터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상징되는 전자왕국, 점유율 1위인 자동차 브랜드의 나라, 서구와 맞먹는 금융산업까지 아시아를 대표하며 반짝이던 나라 일본은 어쩌다 이렇게 옹색한 나라로 변해가는 걸까?
● 세계 최고 물가 일본이 어쩌다..개발도상국 되고 있다고?!
일본은 불과 10년 전인 2010년대에도 전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나라 중 하나였다. 미국 컨설팅업체 머서가 2012년 발표한 자료를 보면 도쿄는 미국 뉴욕, 스위스 제네바를 제치고 생활비가 가장 비싼 나라로 꼽혔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일본의 물가는 한국보다 낮은 수준이 됐다. 도쿄 디즈니랜드 입장료는 지난해 8월 기준 8,200엔, 우리 돈으로 8만 1,615원이다. 이는 미국 디즈니랜드 입장료 1만 4,500엔(약 14만 5천원), 상하이 8,824엔(약 8만 8천원)보다 낮은 가격이다.
저가 생활용품을 파는 다이소의 제품가격도 일본은 100엔 균일가격을 쓴다. 하지만 다이소는 한국에서 3천원~5천원 가격을 더 높게 받고 있고, 미국, 동남아에서도 일본 물가 대비 2배 정도 값에 제품을 팔고 있다.
일본 현지인들은 구매력이 줄어 물가 부담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한국에서 본 일본은 사실상 20년 전, 30년 전 가격에 머물러있는 쇠락하는 나라라는 게 여러 지표로 확인된다.
10년 뒤 팬데믹 기간을 거치는 동안 일본 경제가 뒷걸음질하며 실질 구매력은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 각 나라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과 물가 수준을 감안한 구매력 평가에서 태국, 스리랑카보다 낮은 순위로 집계된다.
OECD에서 집계한 나라별 구매력평가(PPP:Purchasing Power Parity)를 1971년부터 2021년 40년간 추이를 뽑아 그래프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한국이 70년대 이후 경제개발로 한강의 기적을 쓰는 동안 일본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일찌감치 정점을 찍고 미국의 견제를 받은 이후 예전 위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경제규모는 한국을 압도했지만, 아래 파란 그래프의 기울기처럼 일본 내 국민들이 느끼는 삶의 팍팍함은 미끄러지듯 하락하고 있다.
● 7년 만에 최저라는 일본 엔화..더 만만해진 옆 나라 물가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일본 여행하기에 제격인 시즌이다.
며칠 전인 3월 마지막 주 기록한 엔저 현상도 더 이상 일본이 강한 경제력, 막강한 저축 규모 등을 바탕으로 엔화를 지탱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의심도 키웠다.
일본 엔화 환율은 3월 28일 1달러에 123엔까지 추락해 7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그런데 2015년 당시 일본의 엔저로 인해 한국이 타격을 입을거라고 호들갑 떨던 것과 요즘 나오는 소식들은 전혀 결이 다르다.
국제결제은행이 집계한 실질실효환을 보면 일본 엔화 위상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또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이 현재 환율 수준을 지키고 있는 것에 비해 일본은 50년 만에 최저 수준, 그러니까. 50년 만에 가장 싼 값에 거래되는 화폐로 전락했다.
강력한 일본 경제, 막강한 금융정책. 그런데 왜 이런 상태라는 게 믿기지 않는 알아볼 수록 신기한 나라다.
① 돈풀기에 취했다..경쟁력 잃어버린 일본이 제조업
많은 외신, 언론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경제력 약화를 탈출하기 위해 유례없는 돈풀기를 이어가고 있다. 전 세계가 공급망 단절, 전쟁, 코로나 여파로 살인적인 물가 상승을 겪고 있는 것과 반대로 일본만 홀로 0%대 물가 상승으로 마치 다른 행성에 있는 듯 보일 정도다.
이런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보인다. 우선 돈 풀기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있을 가능성, 둘째로 일본 직장인들의 임금수준 약화로 구매력이 떨어졌을 경우다.
일본은 아베 전 총리가 2013년 3월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를 통해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펼쳐 엔저를 유도해왔다. 엔화를 약세로 만들면 도요타, 소니, 소재부품 등 막강한 제조업을 가진 일본의 수출이익은 계산기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기업 이익이 부풀려지고, 돈을 풀어 증시를 부양하니 주가가 오르고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일본도 결국 달러 경제에 한 구성원이라.. 미국의 저금리 정책 중단의 충격을 그대로 받기 시작했다.
미국에 투자하면 금리를 더 받는 환경, 2%대 미국 국채를 살까? 0%대 일본 국채를 살까. 심지어 일본의 투자, 엔화 안정을 지탱하던 국내 투자자들조차 이제 달러를 모으는 지경에 이르렀다.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고.. 엔화값은 떨어지고 다시 달러로 몰려들고. 돈을 푸는 동안 가치는 더 내려간다. 이런 공포에 엔화값이 추락했다.
② 버는 돈 줄어드니 일본인들의 임금 수준 하락
동시에 이렇게 엔화를 낮춰주었음에도 일본 국내로 들어오는 돈이 줄어드는 건, 글로벌 공급망에 일본은 해외로 많은 공장을 이전해두었고 도요타가 아무리 많은 차를 팔아도 미국에서 달러 수익만 늘어날 뿐 일본 경제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기업이 돈을 벌지 못하니 직장인들에게 줄 임금이 늘어날리 만무하다. 수입해서 들어오는 제품들의 가격은 오르는데 웬만한 직장인들의 임금은 20년 전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가 됐다.
실질임금을 OECD에서 찾아보면 한국은 2020년 4만 1,960달러, 일보은 3만 8,515달러. 한국이 더 많은 임금으로 더 많이 소비하는 나라로 나타난다.
이런 상황이니 자연스레 사람들은 앞서 사이타마처럼 할인하는 가게를 순회하듯 돌아야 하고, 경기가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는 환경이 된다. 한국인들에게 이제 일본 물가가 만만하지만 일본인들에겐 어쩐지 부담스러워진 아이러인한 시대가 됐다.
아베도 결국엔 답을 찾지 못했고 존재감이 없던 스가, 뒤를 이어 집권한 기시다 후미오 내각에서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일본이 변하질 못하고 기회를 잡지 못해 경쟁력이 하락하다보니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 하토츠바시대 명예 교수 등 일본 내부에서도 우려와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노구치 교수는 월급이 오르지 않는 일본, 경제가 크고 있는 한국을 비교하며 일본인들에게 충격요법을 주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20년 뒤 한국에게 일본이 추월당할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또 손정의 회장이 말하듯 인공지능 혁신, 디지털 전환을 놓친 것도 일본에게 뼈아프다고 지적한다.
물론 한국도 중국과 미국과의 갈등에 끼어있고, 공급망 재편의 영향을 그대로 맞고 있으니 헤쳐나갈 길이 아직 멀기만 하다. 또 심각한 저출생으로 30년 50년 후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한 경제력 약화를 대비해야하는 숙제도 안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서쪽 경계인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그 반대 동쪽 경계인 한국 일본, 중국과 대만의 긴장 수위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것도 우린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경기 침체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로 한국과의 분쟁을 기회로 삼으려하는 시도도 강해질 수 있다. 일본의 침체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고소한 마음으로 만 볼 일만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