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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선 Dec 20. 2019

진심으로 고맙지는 않아요

사마천의 <사기> ‘이사열전’

우리가 주문을 처리하는 배민 라이더스 앱 공지에 우연히 ‘B마트 전담’ 라이더를 모집한다는 내용을 보았다. 안 그래도 라이더들에게 가장 뜨거운 인기를 받고 있는(=가장 돈이 되는) B마트인데, 전담할 수 있다니! 일단 접수를 하고 볼 일이었다. 

요즘 콜 배차에 있어서 관리자들이 친한 라이더에게 좋은 콜을 몰아준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기도 하지만, 나는 친한 관리자라고 할만한 사람도 없고 한 명 정도 있지만, 굳이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 ‘뭐 그런 것도 능력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뿐이다. 다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며칠 후,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당연히 똥콜을 빼 달라는 전화일 거 같아서, 일단 받지 않았다.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내 주변에 똥콜이 있는지 확인을 해보았지만 없었다. 안심한 후, 전화를 걸었다.      


“네. 방금 전화하셨는데요.”

“네 병선님. 전에 신청하셨던 마트 전담 라이더 하시면 됩니다.”

“(음? 신이시여) 아 그래요?”     


이제 황학동에 있는 마트 콜이 종로중구 어디에 있든, 우선 추천으로 먼저 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큰 형님은 완장을 찼다고 축하해주셨다. 그렇게 마트 콜을 위주로 수입을 쭉쭉 올리고 있는 요즘, 오래간만에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 암병원 건물에 배달을 하러 갔다. 그곳에서 같은 곳에 배달 오신 어떤 형님을 만났다.      


“암병원은 꿀이야 그렇지?”라고 물어보시는 그 형님의 질문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암병원은 암병원장님 지시사항 때문에, 다들 1층으로 내려와서 배달음식을 받아가야 하는 곳이다. 그렇다, 이곳은 꿀이 맞다. 나도 대학로를 중심으로 일할 때는 암병원장님께 내심 고마워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던 그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에게 있어 꿀콜의 기준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의 나에게 그것이 꿀콜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이 배달하는 곳을 넘어, 이 자본주의의 상위계층들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이 사회 구성원들은 더 큰 꿀을 찾아다니는 좀비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넘어서, 저기 저 위에서 울트라 꿀콜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우리 수준에 맞는 적당한 꿀을 나눠주면서, 자신의 울트라 꿀단지를 키워나가는 사람들.     


매년 자신의 꿀단지에서 꿀을 조금 더 퍼주어서 달래가며, 우리들의 시간으로 자신들의 꿀단지를 더욱 크게 채워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로 인해, 우리에게 조금 꿀을 더 줬을 때마다, TV나 언론에 광고되면서 사회적 명예까지 챙겨가는 그들에게 나는 고마워해야 할까, 아니면 진작 그렇게 주지 않을 걸 불평해야 할까. 그런 행위가 뭔가 당연하다는 생각에, 아직은 별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예전에 읽었던 『사기 열전』 시리즈 중에 ‘이사’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 군에서 지위가 낮은 관리로 있었는데,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자주 놀라서 무서워하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이사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있는 쥐들은 쌓아 놓은 곡식을 먹으며 큰집에 살아서 사람이나 개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 

이사라는 사람은 변소의 쥐와 곡식더미의 쥐를 보고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 고급스러운 쥐가 되고 싶은 건, 쥐나 인간들이나 같은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점점 고급이 되어갈수록, 누군가는 점점 뒷간으로 밀려나는 이 자본주의 구조가 존재하는 한, 적어도 인간은 인간다운 행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덜어내는 행위’를 할 줄 아는 인간이다.     


우리가 변소에 위치하는 쥐일지, 곡식더미 위에 위치하는 쥐일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기득권 부모를 둔 자식들은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곡식더미 위에 위치하는 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뒷간과 곡식더미라는 이분법의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곡식더미를 위해, 누군가가 변소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똑같이 나누지는 못할지라도 곡식을 덜어내는 행위는 당연하다. 개인 소유시대이기 때문에, 안 덜어낸다고 해서 뭐라고 할 것도 아니지만, 반대로 덜어낸다고 해서 사실 고맙다고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덜어내는’ 당연한 행위를 고맙다고 해야 할 만큼, 우리는 타락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내가 그것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진심으로’ 고맙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가지게 되더라도, 나 역시 덜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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