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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Feb 04. 2020

언제든 용감해질 수 있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인 유 퀴즈 온 더 블록을 보면 가끔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십 년 전의 자신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그 질문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시절이 있다.

서른 살에서 서른한 살로 넘어가는 가을과 겨울에는 열심히 입사 면접을 준비했었다. 그동안 다니던 광고회사에서 이루기 힘든 꿈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TV 광고를 만드는 것은 카피라이터의 최종 목표 같은 것이었다. 경력이 그리 화려하지 않고 아직은 실력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지만 열정은 들끓었다. 서류가 통과하고 면접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면접관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직원을 뽑든 안 뽑든 가고 싶은 회사의 입사 담당자에게 이력서를 보냈다. 서른 개도 넘는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단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포기보다는 오기가 생겼다. 자기소개서를 수정하고 또 수정해 쉬지 않고 다음 회사 그다음 회사에 메일을 보냈다. 언젠가는 되겠지 했던 면접의 기회는 슬슬 나 자신에게 의심이 생기기 시작할 때쯤 왔다.

강남에 있는 꽤 규모가 큰 광고회사였다. 유명세를 탔던 광고들도 있어서 이런 회사에서 일하면 나의 커리어도 어디 가서 명함은 내밀 수 있을 것 같았다.

토요일 오후 4시. 면접 일정이 잡혔다. 회사에 들어서니 주말 근무를 하는 몇몇 사람이 보였다. 주말 근무, 야근이라면 지긋지긋하게 했는데도 가고 싶은 회사의 직원들은 멋져 보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간 대기실에는 두 명의 지원자가 더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이었다.

면접관은 두 명. 나는 딱 세게의 질문만을 받았다. “TV 광고 경력이 없네요?” “잘할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자신보다 좋은 경력을 가진 지원자가 있다면 그를 뽑아야 할까요? 우비 씨를 뽑아야 할까요?”  

질문은 예상치 못하게 공격 적었다. 아무리 열정이 크데도 자신감이 떨어졌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기죽었고, 자존심이 상했다. 면접만 보면 내 능력을 확실히 어필할 수 있을 거라던 나는 없었다. 면접 시간이 십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시 전철을 타고 면접을 세 번은 더 볼 수 있는 시간만큼 걸려 집으로 왔다.

면접 한 번에 KO패를 당했다.

다음 면접은 이전의 상처에 딱지가 떨어질 때쯤 잡혔다. 집에서 한 시간 반이나 떨어진 서울 끝자락에 위치한 회사였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굵직한 광고 캠페인을 해내는 회사였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았다. 그 어떤 질문도 지난 회사의 면접만큼 심장을 쪼아 대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혹여 그렇다 해도 마지막이니 기죽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세 명의 면접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운데 민머리가 반짝이는 카리스마의 사나이가 보스인 것 같았다. 질문은 전과 같이 나에 대한 물음표로 가득했다. 원하는 경력이 없는 경력자를 뽑기가 쉽지 않을 테니 이해가 되었다. 진솔하고 차분하게 대답을 하던 중 이렇게 가다가는 결국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리스마 보스가 더 고민하기 전에 내가 먼저 카드를 던졌다.

“신입 수습 뽑는다고 생각하시고 딱 3개월만 일하게 해 주세요. 그동안은 대표님이 주고 싶은 만큼 최소한의 월급만 주셔도 좋습니다. 3개월 후에 자르시면 제 능력을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나겠습니다. 만약 마음에 드시면 그때 제대로 연봉 계약하고 싶습니다.”

세 사람의 심사위원 모두 기가 차서 웃었다. 알겠다고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면접 다음 날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십 년 전엔 수업이 도전하고 깨지고 피할 수도 있었을 상처에 돌진했던 내가 있었다. 지금은 그때만큼 용감한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십 년 전의 내게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서른한 살의 내가 있어서 나는 언제든 용감해질 수 있어. 고맙다”

그때는 부딪혀서 깨졌지만 지금은 웬만하면 돌아갈 길을 찾는다. 직진 밖에 모르던 삶에 우회전 좌회전 스킬이 생겼다. 하지만 언젠가는 또다시 직진으로 들이받아야 하는 때가 오리란 걸 안다. 그것이 일이든, 사랑이든, 무엇이든.

직진의 기술이 녹슬지 않기 위해 오늘을 허투루 살 수가 없다. 오늘도 하루치의 용기를 더 쌓는다.


(C)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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