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일 선물은 원사와 말싸움이었다. 파견 나간 후임의 휴일 하루를 두고, 줘야 한다는 간부님과 주면 안 된다고 말하는 병장 사이 말싸움이었다. 병장은 화가 많은 사람이었고, 언쟁으로 끝났을 법도 한 전화는 병장의 한숨을 끝으로 끊어졌다. 수화기가 내려간 뒤, 터벅터벅 병장은 헐거운 군화를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간부의 설교.
"그쵸? 그쵸?? 저번에 이야기했지, 예의 없게 대답하는 거 고치라고"
"내가 너 대학 동기냐, 아님 대학 선배냐?"
"그럴 거면 너가 관리, 운영하고 책임지던가"
병장은 답답하듯 한숨을 연신 내뱉었고, 한숨은 간부의 화를 돋우기만 할 뿐이었다. 병장은 이러한 특혜가 부대원들 사이의 불화를 일으킬 수 있다, 3일을 쉬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 그때 휴가 풀리면 우리도 인원 상황이 부족하다 주장했지만, 병장과 원사 둘 다 가릴 것 없이 서로의 쳇바퀴에서 열심히 발길질을 할 뿐이었다.
"관측 좀 갔다 오겠습니다."
1라운드 종료 벨이 울린다. 정시 업무는 합법적인 종료 벨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혹시 업무가 늦을까 말도 제대로 못 했던 병장이었다. 그렇게 병장은 분노를 꾹꾹 발걸음으로 누르며 다시 옥상으로 올라간다. 정시 업무를 하며 병장은 생각한다.
'그냥 포기하자, 대화가 안 통한다'라고.
2라운드 시작. 아까와는 경기 형세가 다르다. 병장은 아까부터 책상 위 포스트잇 수첩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서울 디지털 대학교'라 적혀있는 수첩. '우리 학교도 비대면 하면 서울 디지털 대학과 다를 바가 없네.' 그러한 잡념 속에서도 개미 기어가듯 "죄송합니다." 대답은 끊이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반항적인 성격에 수도 없이 많이 대들고 혼나 본 병장이었다. 한두 번 혼나 보면, 악센트, 억양, 음의 높낮이, 말의 휴지만으로도 알맞은 답변을 골라낼 수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일본 사람에게 혼나도 똑바로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1라운드와 달리 누그러진 병장의 투지에 꾸중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전날에는 비행단장(1스타)과 감찰실 간부들이 직접 병장 근무지에 왔었더라더니 이번 생일도 참 쉽지 않다. 저번 생일에는 마른 뇌우를 받았었다. 마른 뇌우. 기상 관측병들이 비가 없이 뇌전(번개), 뇌성(천둥)을 관측할 때 쓰는 용어이다. 뇌우의 우자가 '비 우(雨)'자인데 마를 수가 있나. 영화 속 천둥번개는 일률 단편적이다. 토르나 퍼시 잭슨 정도를 제외하면 천둥 번개는 언제나 장대비와 함께한다. 어두컴컴한 밤, 가로등에 비추어진 도로 바닥으로 장대비가 쏟아지며, 하늘을 가르는 번개과 하늘을 채우는 천둥. 거기서 살인을 하듯, 목격을 하듯, 영화는 시작된다. 하지만 현실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분명 땅 위로 내리꽂는 뇌전을 관측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대 여섯번 관측했다.
그 당시 난 짝대기가 2개였다. 내 옆에는 관측업무를 배우기 위해 하사 한 분이 계셨다. 혼자 근무 선지 얼마 안돼 어리바리 타는 일병에게 마른 뇌우는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선임들도 많이 겪어보지 않은 뇌우인데, 심지어 말랐다니. 여차저차 근무를 마칠 때쯤 정신이 없어 중사님께 '번둥'을 반복하며 놀림을 받던 것이 내 저번 생일의 기억이다. 그때도 참 고생스러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생일을 보니 역시 일보다는 사람 관계가 어렵다는 말은 맞는 것만 같다.
병장은 돌아와서 핸드폰을 키고 카톡을 확인한다. "행복한 개구리/ 카톡 안 봐요"라고 당당히 상태 메시지를 올려놨던 병장이었지만, 이렇게 합법적으로 관심받을 수 있는 기회를 병장이 놓칠 리 없다. 상태 메시지 덕이었을까, 작년에 비해 축하 메시지는 적었지만, 뭔가 더 알차 보였다. 당장이라도 내일 약속 잡아 술 마시고 싶은 사람들만 축하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휴가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기프티콘 류의 선물을 보내기 꺼려졌었나 보다. 선물보다는 어서 휴가 나와서 같이 놀자는 격려의 메시지들이 더 많았다.
올해는 작년과 새삼 다르다. 애초에 (미복귀) 전역날이 올해 있다는 점에서부터 작년과는 천지차이긴 하다. 군인에게 하늘이 뒤바뀔만한 일은 코로나 4차 대유행, 올림픽 금메달도 아닌 본인의 전역 밖에 없다. 작년 이 맘 때쯤엔 내 인생 가장 저점이었다. 인생에 주식이 있다면 풀 매수 타이밍. 비관적인 휴가 지침과 코로나 상황으로 나와 전 여자친구 사이 밧줄은 점점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학 입학부터 시작된 자기 자신을 향한 자책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쉽다는 걸 알면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군생활과 잘 활용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실망이 가장 큰 이유였다. 우울했고, 또 우울했다. 무력감과 절망감에 자살 생각을 멈추지 않는 자신을 보며 소름 돋았었다. 아 이대로 두면 죽겠구나 싶어서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을 받은지도 어느새 1년. 1년을 되돌아보면, 군생활 속 상담은 내 인생에서 손꼽힐만한 선택이었다. 이 말은 상담을 향한 내 만족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선택이 부재한 내 삶을 향한 반성이기도 하다. 언제나 내 선택은 남들의 조언을 베끼기만 할 뿐이었으니깐 말이다. 그렇기에 상담을 받기로 결정하고 선택한 과거의 내 자신이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실제로 상담을 받는 1년 동안 난 많이 성장했다. 어색하고 능숙지 못한 점들을 인정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을 찾아 연습했다. 감정 조절에 있어서도, 능동적인 선택에 있어서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좋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무엇보다 가장 직접적인 위험이었던 자살 생각 역시 떠난 지 오래다. 물론 방심하긴 이르다. 아직 고질적인 문제점들은 몇 가지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생 공허함을 달고 살거라 비관했던 과거완 달리 열심히 노력한다면 해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금융 상품에도 만기 적금형 상품이 있지 않는가. 상담 역시 그런 만기 적금형 상품과 비슷한 것 같다. 일주일에 1번씩 1시간 동안의 상담은 차곡차곡 모이더니만 넘어져있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줬다. 작년의 난 참 마음적으로 가난했었다. 여유가 없었고, 그나마 있던 자신의 마음도 잘 지키지 못했었다. 자꾸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기대서 찾으려 했었다. 당연히 뜻처럼 잘되지 못했다. 예민하고 우울한 날들의 반복이었다. 지쳐 결국 모든 걸 포기하려고 마음먹자 지난 삶이 억울했다. 부모님에게도 죄송하고 말이다. 그래서 한번 시작해본 상담이 이렇게까지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끌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작년 비참했던 내가 선택했던 상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