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가 끝났다. 대학 1학년부터 늘 꼬리표처럼 따라오던 악몽은, 비와 번개가 그치듯 맑은 하늘만을 남겨놓고 사라졌다. 슬럼프에 대해선 난 이상화 선수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슬럼프는 자기 내면에 있는 꾀병이다.]는 말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의 명언을 듣고는, 나도 먼 훗날 슬럼프조차도 이겨내는 강인한 사람이 되겠다 다짐했었다. 그리고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공부하지 않는 자신을 탓하고, 성실하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했다. 늪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 열심히 계획을 세우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안 봐도 뻔했었다. 똑같은 실패의 반복 속에서도 채찍질만 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 달리는 말에게 채찍질은 동기부여이지만, 누워있는 말에게 채찍질은 동물학대란 것을 모르고 있었다. 늪에서 왜 나오지 못하는지 더 고민하고 더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슬럼프에서 나왔던 적은 없었다. 그렇게 평생 깨지 못할 것만 같은 슬럼프는 상당히 우연적인 일들의 연속으로 어느새 깨져있었다.
1) 마음 내려놓고 자신을 사랑해라.
슬럼프에 금이 나기 시작한 것은 지지난 휴가 때였다. 휴가 전 나는 술 문제로 군대에서 징계를 먹었었다. 시간 지나면 그저 안줏거리라며 나를 위로해주던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이 책을 추천해줬었다.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책을 받자마자 제목에 빵 터졌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술과 관련된 책은 아니었다. 물리학과 출신 스님, 아잔 브라흐마가 쓴 책으로 불교 관련 책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빨리 늙는 책이었다. 차분하고 단정적인 어조로 저자는 나에게 마음을 내려놓는 것의 장점 및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책만 피면 졸리는 나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 책의 문장들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물론 읽을수록 느껴지는 포근함에 세상 꿀잠도 많이 잤다. 남을 자신만큼 사랑하고, 자신을 남만큼 사랑하라는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고민에 빠진 남에게 건네주는 따뜻한 위로와 현명한 조언을 나에게도 들려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스크를 쓰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의대 교수님의 글이었다. 과학 역사 속에도 꽤 많은 삽질이 있었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의 공들인 삽질 말이다. 한 때 물리학계에서도 빛보다 빠른 물질이 나왔다고 세상이 호들갑을 떨던 시절이 있었지만, 곧 실험 오차로 밝혀졌었다. 그렇기에 난 과학적 근거가 있다 할지언정, 마이너 한 의견들은 주장하는데 조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음모론적인 성격도 꽤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게 왠 걸. 교수님의 글을 챙겨보시는 팬은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난 그와 키보드 배틀을 했다. 사실 배틀이라기에도 뭐한 게, 대부분 뚜드려 맞고, 격식이나 예의 차린 답시고 결국 상대의 말을 다 인정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분 나쁜 대화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을 나에게 알려줬다.
나는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聖人)이 아니다.
대화를 곱씹어보면 볼수록, 나는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다. 완벽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틀린 말은 해서는 안된다 주의였다. 논리적으로 perfect 한 말들만 해야 하고, 이러한 말들은 사사로운 내 생각이나 주관적인 가치관에 기저를 둔 것이 아닌, 누가 보아도(관성 좌표계에서) 옳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누가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내 스스로에게 바라는 것은 너무 과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나는 아직 많이 어리석다. 내 주장과 의견들은 비판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만연의 진리를 내가 제안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욕심이 있었나 보다. 모두가 내 말에 공감해주고, 맞다고 인정해줬으면 하는 욕심 말이다. 그를 위해서 나는 "내 의견에 반대할 사람"과 끝나지 않는 셰도우 복싱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절대 끝나지 않는 싸움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의견이 다르고, 이들 중 대다수를 만족시키려는 노력 역시 '이룰 수 없는' 목표다. 나는 스스로 '답이 없는' 문제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 역시 일개 사람이고, 나 역시 일개 의견일 뿐이란 걸 키보드 배틀에서 깨달았다.
3) 걱정은 걱정을 낳을 뿐이고, 완벽주의는 완벽함을 저해한다.
세 번째는 후임의 추천으로 읽은 경제학 책이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주식을 최근 들어 시작했는데, 난 처음에 주식이 어떻게 돈이 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시세차익을 통해서 돈을 버는 주식의 구조에 거품이 많이 끼었다고 생각했다. 설명하긴 매우 어려우니 일단 생략.
원래 난 하나가 해결이 안 되면 "그렇다 치고"가 안 되는 성격이라 경제를 사탐으로 본 후임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더니 후임은 나에게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란 책을 추천해주며, 내가 궁금해할 만한 역사와 경제의 시작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말해주었다. 혹시 몰라 지금 고백하지만, 중간까지밖에 안 읽었다. 너무 졸린걸 어떻게 하겠는가.
이 책 속에서 내가 주목한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두 번째는 맬서스의 "인구론".
원래 난 지독한 완벽주의를 표방한다. 실제 그렇게 공부하거나 일을 처리하지도 않았으면서, 언제나 일의 초기 단계에서는 A부터 Z까지 계획을 다 세워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다. 남이 넘길법한 시시한 문제를 심각히 받아들이며, 그로부터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난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컨트롤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완벽함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했다.
아마 맬서스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는 "인구론"이란 책을 통해, 인구 증가가 곧 식량 생산을 능가하여 식량 부족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책을 통해 인구 증가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같은 맥락이었다. 사실 책 찾아보기가 너무 귀찮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식량 생산량의 증대는 선형적이고, 인구 증가는 지수적이라 가정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어떻게 식량부족이라는 비극적 상황에 가지 않았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인다. 비관적인 가정은 비관적인 결론을 도출할 뿐이라고.
맬서스는 비관적인 생각으로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가 예측한 미래는 일어나지 않았다. 합리적이고 똑똑한 생각이었지만 결국 틀렸다. 그가 걱정했던 문제는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자유롭게 허락한 결과인 자유시장이 알아서 해결해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논리적으로 따지고 제어하던 그가 아닌, 흘러가는 대로 두었을 뿐인 자유시장이 (있지도 않았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그런 옛날 옛적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자꾸 강물을 막아서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나의 움직임과 생각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제어하면서 스스로를 잘 못 쓰고 있었다. 이는 최근 대학 후배한테 농구를 배울 때도 느꼈다. 몸이 가는 대로, 리듬 그 자체를 받아들여야만 슛을 잘 쏜다는 것을 배우면서 말이다. 가장 완벽함에 이르는 길이라 믿었던 완벽주의가 사실은 가장 큰 저해 요소였단 걸 깨달았다. 결국 큰 흐름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던 것이다.
4) 스스로 깊게 생각하는 것을 멈추자, 문제는 단순해졌다.
네 번째는 후임과 다툼에서 깨달았다.
주말마다 병사는 8시에 휴대폰을 불출하는데, 주말에도 새벽에도 일하는 크루 근무자의 경우 그 시간에 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과 제인 후임이 계속 그 폰을 꺼내 줬었는데, 주말 아침마다 늦잠을 끊고 나와서 꺼내는 것이 영 힘들었나 보다. 그래서 돌아가면서 뽑자고 제안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언쟁이 있었다.
힘든 근무로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랬던 것인지, 후임은 자신이 우리를 위해 폰을 빼주며 희생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냐고 화를 냈다. 크루 근무자들도 나름대로 일과제 병사들을 위해 해주는 것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들이 무시당한 느낌을 받았고 서로의 서운함 속에 언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기특한데, 내가 싸움 중간에 후임에게 말했다.
"나 지금 너무 감정이 올라와서, 지금 말하면 서로 감정만 상할 것 같은데,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
꾸준히 받은 상담과 간부들과의 언쟁 경험이 꽤나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난 새벽 근무를 하러 왔고, 그날 밤 난 잠을 자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계속 불만과 화가 올라와서 잠을 자지 못했다. 근무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분노와 논리적인 언쟁들에 매우 피곤함을 느꼈다. 아침에 생활관 복귀 때까지 그러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다 어쩌다 입에서 튀어나온 말.
Stop thinking. Think in English.
영어로 생각하라는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이었다. 내 영어실력은 내 분노(?)를 따라가기엔 조금 아쉬웠고, 그렇게 해서야만 난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생각을 멈추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꽤 변화가 생겼다. 우선 소심해지지 않았다. 자꾸 남 눈치를 본다거나, 스스로를 위하지 않는 생각이 들 때면 그저 생각을 멈춰버렸다. 나에게 선물 같은 결정을 할 때도, 밀려들어오는 반박들을 영어로 멈출 수 있었다. 2차, 3차 결과들을 예상하며 초조해하는 스스로에게 '멈춤'으로 위안을 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멈추니 문제는 단순해졌다.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 걱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었고, 현학적인 말들로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자연스럽게 밝아지고 맑아진 것 같다.
5) 인스타와 유튜브를 그만두다.
여백을 견뎌라. 마지막 글에서 썼던 것이다. 요즘도 드는 생각들이지만,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는 나를 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재밌고, 보고 싶은 내용들이 있어서 열어보는 것이 아닌, 심심함과 외로움, 그리고 공허감으로부터 도피하려고 자꾸 클릭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난 유튜브, 인스타그램, 웹툰을 지난 6월 26일부터 끊었다. 취미인 춤으로만 모아둔 인스타그램은 크롬을 통해 꾸준히 접속했다. 영감(inpiration)은 춤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고, 이렇게 절호의 핑계를 모른 척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잘 끊었냐고? 절대 아니다. 사람이 심심하고 폰으로도 할 게 없으니 별의별 것들을 다 했다. 게임도 깔아보고, 카톡 오픈 채팅도 계속 계속 찔러보고, 연락처 사람들에게 연락도 싹 돌렸다. 사실 그러면서, 과연 내가 나아지고 있는 것인가? 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공백에 23일 만에 개인 인스타 계정을 다시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간 인스타그램이지만 정말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똑같이 군바리였던 내 친구들은 하나둘씩 전역 인증 게시물을 올렸고, 알던 사람은 어느새 외국으로 넘어가 외국인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춤을 추던 동아리 사람들의 실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삼삼오오(오는 안 되겠구나 방역수칙 때문에) 모여 근사한 곳으로 여행 가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새로운 취미를, 누군가는 알던 사람과의 반가운 만남을, 누군가는 멋있는 사진을 찍었고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언제나 그랬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 게시물들과 스토리를 보고 있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컥했다. 나는 여기서 내 청춘을 잘게 찢어 아궁이에 넣고 있는데, 누군가의 청춘은 눈을 감아도 선명할 만큼 활활 타오르고 있다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비혼주의자는 결혼으로 완성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난 오랜만에 다시 접속한 인스타그램을 보며, 인스타그램을 지운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익숙하던 감정들이 다시 차오르며, 나를 잡아먹으려 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지운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슬럼프가 끝나면서 글이 적어졌다. 의견을 남에게 관철하려는 시도가 줄었다. 정확히는 의식적으로 줄이려 했다. 예전과 달리,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글을 어떻게 쓸지 상상하지 않는다. 내 생각을 들은 누군가는 나에게 감명받을 것이라 우쭐되지 않는다는 말과 동치다. 점점 세상을 향해 소리치던 내 목에 힘이 빠진 느낌이었다. 목뿐만이 아니다. 온 몸에 힘이 빠졌고 제일 편한 자세로 누워있다.
요즘 내 삶의 신조는 [스스로를 망치지 말자]이다.
결국 유혹도, 욕심도 모두 덧없고 무상한 것을, 그런 거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망치지 말아야겠다고 느낀다. 집착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라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뭐가 됐든 스스로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집착이고 곧 패착이다. 더 나를 아끼고, 더 나를 사랑해서, 내가 좋은 길로만 갈 수 있기를. 그 어떤 길 위에서도 내가 걷고 있음을 까먹지 않기를.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를 망쳐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