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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f Aug 03. 2021

죽음으로 삶을 되찾아온 이야기

1) 진이 지니

혹시, 종이책 페이지 한쪽마다 수면제 성분(Roth-fla) 성분이 발라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마, 몰랐을 것이다. 방금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니깐 말이다. 책을 피면 몰려오는 잠을 쫓을 때마다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수면제 성분이 종이책에 발려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곤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책을 펼 때마다 졸릴 수가 없을 것이다. 인문학 서적, 소설, 자기 계발서 가릴 것 없다. 불면증 치료제로 책을 연구한다면 금방 돈방석에 앉을 텐데란 생각을 할 때쯤이면, 이미 책은 잠 주머니가 돼버리고 그날 독서는 물론 그 책 역시 떠나간 버스가 돼버린다. 오랜 경험상 깨달은 것은 한번 졸린 책은 영원히 졸리다는 것이다.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붙들어봤자, 독서 속도와 효율은 이미 바닥을 기며 힘들게 넘어간 페이지가 아깝게 뇌는 어떠한 것도 담아가지 못한다. 유독 난 반만 읽은 책이 많은데, 그중의 50%가 아마 읽다 졸았던 책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는 말은 식곤증 말고는 해석될 길이 없었다. '그래, 뭐 배부르면 잠 오는 게 이치인데 마음도 그런가 보지'며 우스갯소리를 스스로 생각해내곤 속으로 키키거렸다. 분명 마음이 들뜨고 가라앉는 것은 꽤 느껴봤지만, 마음이 부푼 것은 이 책을 읽고 처음이었다. 설렘이나 긴장 같은 것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영감이 마구 들이치는 것 같았다. 책의 마지막 문장 너머론 새로운 세상과 관점, 깨달음이 적혀있었다. 어서 빨리 내가 받은 '인상'을 남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친 것을 보면, 마음 역시 분출될 출구가 필요했나 보다. 내면세계는 별처럼 역동적으로 팽창하고 압축되기를 반복하며 책 속 세상과 공명하고 있었다. '난 과연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앞에 제시된 민주와 진이(작중 주인공들의 이름)가 이렇게 대비되는구나.' 등 생각은 책을 떠나지 못했고 감탄은 끊이지 않았다. 작가가 설계해놓은 장치에 기분 좋게 속은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들은 모여 하나의 다짐으로 이어진다. '다시 읽어야겠다.'


자고로, 박진우라는 사람은 책과 영화에 있어서 '다시'가 없는 사람이다. 시간과 노력을 꽤 들인 작품을 다시 경험한다는 것은 언제나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아는 것이 줄 지루함을 견딜 자신도 없다는 이유는 물론, 얻을 것도 없어 보이는 비관적 전망이 그 이유이다. 2시간을 기다려서 탄 놀이기구 줄을 다시 서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런 박진우 예술감상사에 있어서 이 책은 크나큰 반례가 되었다.



1) 취향저격 묘사

책을 읽으면 왜 졸린 것일까? 당연히 몰입의 문제이다. 책은 현시대로 오면서 강한 경쟁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편집과 음향으로 점철된 영상 매체들은, 직관적이고 즉각적이라는 강력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CG 기술과 촬영기법들은 날이 갈수록 발전했고 상상 그 너머 무언가를 눈앞에 대령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현실감각에 관객은 작품에 금방 몰입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사과의 이미지를 글로 그리려고만 해도 2 문장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그렇기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몰입'에 관한 고민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독서의 첫 과제, 몰입부터 늘 C+였던 내가 어떻게 이 책엔 잘 몰입할 수 있었을까, 우선 책의 장면이 대체로 영화와 닮아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뇌우치는 밤 극적으로 시작하는 도입부, 정자에서 웃음을 유발한 등장인물의 케미 등 책의 여러 장면들은 한국영화의 그것들과 크게 닮아있었다. 유명한 레퍼런스들이 머릿속에 밑그림으로 있으니 몰입은 더 수월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두 번째 타자로 두 개의 시점으로 작품이 전개된다는 점을 꼽고 싶다. 작품은 '김민주'(남주)와 '이진이'(여주) 두 명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차용한다. 그러나 작품 속 시계는 돌아간다거나 멈추지 않는다. 투수가 교체돼도 경기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회상이 나올지언정, 서술의 시점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두 개의 시점은 서로 시간을 다해갈 때마다 서로에게 '상황'을 토스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토스 사이 연결고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되려 간접적으로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뜻밖의 불친절함에 독자는 더 능동적인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실제로 처음 읽을 땐,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여기서 시점이 끝나면 어떡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란 물음표를 해결하며 읽다 보니 어느새 몰입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결고리를 찾는 재미는 쏠쏠했고, 간접적인 서술과 설명들은 세련된 문장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는 계기였다.


전체적으로 묘사가 상당히 센스 있고 꼼꼼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상이한 시점으로 이루어진 묘사는 궁금증의 유발 및 해소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긴장의 완급조절을 완벽히 이루어냈다. 읽으면서 생길법한 독자의 질문에 대해선 답을 적어놓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너무 친절하게 답하여 지루한 일은 벌어지지 않게 해 놓았다. '읽는 사람이 과연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을까?'란 고민을 여기저기서 엿볼 수 있는 글이었다. 단순히 시점을 떠나서도 단어 선택이나 문장 배열들은 센스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글과 상황 사이 거리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알맞게 조절되었다. 책이 낯선 나에게, '글 잘 쓰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직접 시범을 보이는 것 같다 생각했다. 표현이나 완급조절에 있어서 많이 느끼고 배울 수 있었던 글이었다.


2) 탄탄한 세계관(스포 주의)

보노보(유인원 한 종류)를 구출하다 고라니와의 교통사고로 보노보 몸속으로 들어간 사육사(이진이)의 영혼. 삶에 언제나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김민주는 의미를 찾기 위한 (잠정적 마지막) 여정과 노숙 도중 고라니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그렇게 이진이와 엮이게 된다. 이진이는 그저 빈사상태의 자신을 다시 찾으면 해결될 것이란 생각에 1000만 원을 주면 도와주겠다는 김민주의 제안에 응한다. 둘은 한 배를 탄다. 연구원을 꿈꿨던 '이과 그녀'는 유인원의 무의식에게 통제를 뺏기는, 이른바 "지니(보노보 이름)의 램프"에 빨려 들어가는 경험 반복 속에 자신이 그저 반갑지 않은 침입자란 것을 끝내 깨닫는다. 또한, 이미 육신은 호흡기를 단 주검이기에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면 남은 건 그저 죽음뿐이란 사실에 그녀는 절망한다. 그렇다고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램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동화되는 자신과 지니를 발견하며, 돌아가지 않는다면 자신이 지니의 삶을 뺏을 것이란 걸 깨닫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선택하고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한 달에 한 번씩 대대로 책 배달이 온다. '진중문고'라고 적힌 책들로 (아마도) 국방부에서 지원해주는 책들이다. 쌓인 진중문고들을 짱 박아놓은 서재에서 우연히 찾게 된 책, [진이 지니]. 재밌는 책은 아무래도 소설이겠지라며 집었다. 처음에는 밀렵꾼에게 잡힌 보노보가 나오길래, 보노보를 구하기 위한 여정 내지는 보노보와 사람 사이 끈끈한 우정 정도를 예상하며 읽어나갔다. 하지만 이진이의 영혼이 보노보로 들어갔다는 걸 암시하는 묘사, 교통사고 후 나뭇가지에 몸이 걸려버린 이진이가 나무 아래로 내려가는데 발로 나뭇가지를 움켜쥐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극심한 사고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계 교란이라 짐짓 넘겨버린다는 묘사를 처음 봤을 때 속으로 그랬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설마는 사실이 되었을 땐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었다.


현실에서는 친절한 미녀 유인원 사육사였던 내가 이 세계에서는 보노보?

도 아니고 이게 뭐야. 내가 찾던 책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에휴, 그러면 또 신체 찾으려 떠나고 극적인 성공. 해피엔딩 짜잔. 하고 끝나겠구나란 (틀린) 불안이 팍 들었다. 마침 그때 진이 시점에서 민주 시점으로 넘어가길래 '그래, 그렇게 뻔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제발'이란 마음과 함께 마저 읽기 시작했다. 그 선택. 참 잘했다, 진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큰 흐름으론 신체를 찾아가는 여정이었지만 세부 설정이 탄탄하고 논리적인 덕에 페이지를 멈출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1) 가끔 지니 램프로 끌려들어 가는 설정과, 2) 지니 램프는 지니의 무의식을 반영하고, 3) 램프 속 지니의 행동들은 현실 속에서도 그대로 구현된다는 점 4) 진이의 몸으로 돌아가도 죽음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 이 네 가지 설정이 크게 마음에 들었다. 보통 영혼 빙의(?)를 생각하면 몸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싸우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런 클리셰의 끝자락을 붙잡고 가는 플롯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참신함은 발상의 전환은 물론 납득할만한 친숙함을 가지고 있어야만 비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쇼미 더 머니에서 발라드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그 사람이 랩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해진 범위 안에서의 새로움이 가치 있는 것이지, 무분별한 새로움은 동문서답일 뿐이다라는 것이 내 의견이다.


이야기 기반에 깔린 논리들이 매우 촘촘하고 well-made란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들의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정황들이 ~~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스탠스가 아이러니하게 논리의 치밀함을 부각해주었다. 무엇보다 어느 순간부터 "말도 안 되지만 만약 그렇다면, 진짜 책 같은 상황이 펼쳐질 수 있겠다."라고 납득하는 내가 있었다. 뻔한 주제와 생소한 소재였던 보노보를 잘 묶어 '뻔하다'라고 자부할만한 독자들에게 얼얼한 딱밤을 선사하는 줄거리였다 평하고 싶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주어진 틀에 충실히, 그리고 치열히 고민했던 작가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3) 난해하지 않지만 꼼꼼하고 잘 짜여진 구조, 복선, 비유

어쩌면 다시 읽어보리라 다짐한 계기에 가장 가깝다. 나는 글 중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메시지'가 담긴 책이라고 느끼진 못했다. 되려 작가의 참신한 상상력과 그로부터 구축된 세계와 이야기를 즐기는, 그런 부류의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반부가 될수록 고조되는 등장인물들의 내면 갈등과 마지막 죽음을 선택하는 이진이의 결정을 보면서 결국 이걸 위해 달려온 책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복선은 줄거리에 있어 '당위성'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극적인 전개가 뜬금없지 않도록 도와주는, 전개의 근거가 되어주는 녀석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한편에 서프라이즈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잘 숨기고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러한 점에서 글의 복선과 비유들이 아주 잘 짜여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와, 이게 이렇게 이어진다고?"란 감탄을 연신 반복했기 때문이다.


책에서 해설한 복선들도 감탄의 대상이었지만, 글을 다 읽고 나서야 눈에 보이는 소재와 설정의 이유가 내게 소름을 일으켰다. 예전 국어 공부를 했을 때 늘 문학을 어려워했던 나에게 문학 선생님이 해주신 조언이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글에 쓸데없는 것을 넣지 않는다. 문장, 단어, 소재, 주제 모두 심혈을 기울여 Best of Best만을 넣는다."

내가 배우지 않은 작품 중에서 이 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 침팬지가 아닌 보노보를 선택한 이유

- 등장인물의 이름이 이진이인 이유

- 이진이가 그토록 삶에 애착이 강하고, 김민주가 삶에 애착이 없게 설정한 이유

- 김민주가 장의사에게 시신의 몸을 관에 넣기 위해 가다듬는 것을 배운 이유, 그리고 '삶의 문지기'라고 언급한 이유


등, 책에서 마저 설명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자 내가 찾지 못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또 읽고 싶어 졌다. 아마 또 읽고 싶다는 마음이 마지막 해설 부분과 작가의 말을 보자마자 책을 덮은 이유일 것이다. 스포일러 당하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 찾아보고 싶었다. 원래는 한번 더 읽고 (시키지도 않은) 서평을 적을까 고민하다, 첫인상 역시 예술이 추구해야 할 덕목이라는 지론에 어떻게든 기록을 남겨야겠단 생각에 쓰게 되었다.


4) 죽음으로 되찾는 삶

중학교 3학년까지도 '죽는 꿈'을 꾸면 무서워 엄마랑 같이 잤던 나였다. 한 번은 죽음의 공포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새벽에 대성통곡하는 나를 진정시키려 가족이 모두 공원으로 총출동했던 적이 있다. 여담이지만, 죽음이 두려워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고 싶던 나는 아버지에게 사후세계 존재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래도 아버지가 물리학자니깐 과학에서도 '신의 영역'일 것이라 여기는 현상들이 있지 않을까 어린 마음에 생각했었던 것 같다. 사후세계가 있냐고, 신이 있냐고 패닉한 아들의 질문에 아버지는 자신의 답을 내놓았고 난 눈물을 멈출 수 있었다.

"신이 뭔데? 너무 not well-defined 되어있는데? well-defined 되기만 하면 풀 수 있거든, 모든 문제는"

참... 물리학과답다. 그래서 한동안 well-defined에 꽂혀서, 뭐만 하면 "Umm~ not well-defined 된 거 같은데?"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군생활 상담관은 남들에 비해 오래 지속되는 죽음을 향한 공포는 내가 '통제 가능성'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라 말해주었다. 죽음은 통제할 수 없다. 어떠한 수를 써도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그중 나 역시 포함되어있다. 죽음 뒤 어떠한 세계가 펼쳐지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삶의 끝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보통 곧 모든 것들의 끝이며, 의지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죽음은 자신 정체성 회복을 위한 선택으로 기능한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지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과 실망에 이진이는 새로운 길(철학을 위한 유학)로 회피하려 한다. 그녀의 삶의 방식은 늘 회피보다는 극복으로 일관됐었는데 말이다. '언제나 모퉁이를 돌면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으며' 넘지 못해 보이는 시련도 끝까지 참고 버티며 이겨내는 그녀였다. 하지만 유학을 결심하는 그녀의 태도는 해결보다는 회피에 가까워 보인다. 다행히 그녀는 회피가 자신의 삶이 아니란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의 표지판이 돌아가기 직전에도 그녀는 멀리서 어미가 된 의 출산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육사가 된데 가장 큰 이유가 되었던 침팬지 . 대학시절 팬에게 마음을 쓰며 되려 마음을 뺏겨버린 그녀는 사육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유리창 너머 팬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느껴지는 미련 속에는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후회, 이제 와서 문제를 되돌릴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삶을 향한 애착이 엿보인다. 그렇게 그녀는 출국 단 하루를 남겨놓고 자신을 잃어버리게 한 트라우마의 이유, 지니와 다시 조우한다. 다시 주어진 두 번째 기회. 그녀는 목숨을 포기하며, 자신의 삶,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다. 삶이란 뭐가 됐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때야만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아닐까. 죽음이 곧 자기 삶을 향한 강한 의지였던 것이다. 


죽음이 뿜어내는 강한 의지는 헛되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진이와 정반대의 인물로 삶에 어떠한 의욕도, 욕심도 없던 김민주. 그는 '다정한 그녀'의 죽음을 끝까지 도와줬던 인물이다. '삶의 문지기'로 불리는 장의사의 기술로 죽은 진이의 몸을 손으로 주물러 펴준다. 그는 그렇게 죽음까지 배웅하면서 그녀가 삶을 향해 가졌던 강한 의지를 배운다. 정처 없이 배회하던 김민주는 장의사가 되어 그녀를 회상하면서 살아가는 대목에서 볼 수 있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반대로 죽지 않는 삶을 과연 산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가 말했듯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삶이 결국 well-defined 되려면 죽음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진이는 한술 더 뜬다. 트라우마에 잃어버렸던 자신의 삶을 죽음으로 재정의하고 되찾아 온 것이다. 죽음은 아이러니하게 그녀의 삶을 다시 살려냈고, 죽음은 그녀의 의지의 대상이었다.


한 줄 평 :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부터 메시지까지 모두 취향저격이었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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