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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f Sep 30. 2021

퇴고를 멈출 줄 아는 힘

스스로가 써온 글에 대한 확신일까

지난 1년을 돌아보며,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공들여 쓴 글, 좌절에 취해 쓴 글, 습관을 들이기 위해 쓴 글 등 다양했다. 그 당시 '발행' 버튼을 누를 때 '에라 모르겠다. 더 이상 붙잡고 있지 않을래.'라는 마음이었던 것 치고 글들이 꽤 마음에 들었다. 단어부터 문장까지 다 내 기준으로 술술 읽히던 걸 보면, 내가 쓴 것들이 맞나 보다.

그것 모두들이 다 술술 읽히고, 나름의 구성을 갖추었다는 사실은 뿌듯함보다는 회의감이 들게 하였다. 어쩐지 글들이 다 비슷한 것이었다. 주제는 다 다를지언정, 글을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문단의 구성 등이 글 서로마다 너무 유사했다. 말하자면, 내 글은 너무 읽기 쉬웠다. 술술 읽히고, 독자에게 친절한 문장들로 점철된 글이었다. 자부심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곧 내 글을 전형적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브런치를 둘러보면 메타-글쓰기, 그니깐 글쓰기에 관한 글이 많다. 실제로도, 글에 있어서 도입부의 중요성에 대한 내 생각을 소설 형식으로 정리한 나의 글 역시 내 계정 상위 조회수를 등록하고 있다. 당연한 기본들을 설명하고 있는 글들도 많고, 주제 선정에 조언을 주는 글들도 많다. 그중에서 내 기억에 남는 글의 한 줄 요약은 다음과 같다.

니 꼴리는 대로 써라.

맞다. 꼴리는 대로 써야 한다. 이건 결국 예술이니깐 말이다. 설명문, 제안서, 선언문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명확한 목표가 있고, 명확한 대상이 있다. 수십, 수백 년간 내려져오는 노하우를 형식 삼아 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일이다. 하지만 수필은 효율의 이야기가 아니다. 생각해봐라. 누가 내 이야기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찾아오겠는가.


나에게 퇴고는 글을 깎아내는 것이다. 퇴고를 할수록 글은 나아진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아니, 아니, 그렇게 체감했었다. 생각나는 소재에 맞춰 글을 쓸라 해도 처음에는 막막하다. 생각을 끄집어내기 위해 일단 뭐라도 쓰기 시작하면, 얼추 완성된다. 얼추. 필요 없는 단어나 생략해도 되는 문장, 글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 표현 등이 넘쳐나는 상태로 말이다. 고기로 치면 초벌. 먹으면 바로 설사다.

다듬다 보면, 훨씬 나아진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 속에서도 나온 말이다. 퇴고를 하면 할수록 글이 나아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렇지 않다면 작가를 포기하라고. 그래서 나도 정말 잘 쓰고 싶은 글, 그니깐 많은 사람이 내 노력을 인정해주고 내 메시지에 공감해줬으면 하는 글들은 몇 번씩이고 다시 읽는다. 고치고, 또 없애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하면서 불필요한 부분들은 과감하게 제하는 것. 너무 긴 문장은 둘로 나눠 가독성을 올리는 것. 내가 아는 퇴고는 그런 것인데 말이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을 떠올려본다. 이것들은 필수 교육과정이라면서 읽기가 더럽게 어렵다. 문장도 길고, 지칭도 헷갈리고. 고전 문학은 차치하더라도, 현대 문학 역시 그렇게 독자들한테 친절하지 않다. 수능 특강을 풀면서 얼마나 같은 문장을 수없이 읽었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교육과정에 남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는다.


배울 때야 얼마나 잘 쓴 글인지 체감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그저 남들이 잘 썼다 하니깐, 그것들을 기준 삼아 공부한다. 틀린 말도 아닌 게, 내 마음을 사로잡는 글들도 뻔한 글들은 아니다. 첫 문장이 좀 달라서 몇 문장 읽어도, 일반적 글쓰기 어법을 따라가는 글은 금방 마우스 스크롤을 내린다. '어차피 니가 할 말 여기 있지 않은 거 다 알아.'의 느낌이랄까. 슥슥 내리다 보면, 짬밥이 얼만데 금방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찾는다. 그렇지, 또 뻔한 이야기지. 너도 탈락.


왜 독자들한테 너무 친절한 글은 흥미가 없을까. 비싼 척하는 이성이 더 매력적인 것과 마찬가질까. 아니면 독자의 노력을 독서에 강요하면서 얻는, 독자의 애착 같은 것이 있을까. 모르겠다. 일부러 어렵게 쓴 글은 당연히 아닌 것 같고. 일단 내가 내린 결론은, 잘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확신이라는 것이다.


친절은 걱정에서도 나온다. 난 걱정이 많기에 설명을 잘한다. 수학이나 과학 등 고등학교 반에서도 내가 제일 설명을 잘했다. 나는 사람들이 모른다면, 모르는 이유를 안다고 자신한다. 수학 감각이 극에 올랐던 고3 시절에는, 친구의 답만을 보고도 그 사람이 어디서 착오가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잠깐 샜지만, 친구가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또 해결하고자 하던 친절한 진우 씨는 탁월한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이게 참... 대면 화법은 또는 상대의 반응을 살필 수 있어서 중간중간 조율을 할 수 있는데, 글은 그렇지 않다. 탁하면 딱하고 올라가는 글을 읽는 이들의 반응을 내가 일일이 살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내 걱정은 언제나 쉐도우 복싱으로 땀범벅이다. 모든 문장에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근거가 있어야 한다. 뭐 좋은 말인데, 항상 그러한 원칙에 입각한 글은 평면적이고 재미없더라가 내 결론이다.


최근 병영문학상 응모를 위해 글을 몇 번이나 퇴고해서 그런지, 회의감은 깊어져만 간다. 어디까지가 적당한 퇴고인지도 모르겠고, 글 잘 쓰는 사람은 도대체 뭔 확신으로 그렇게 불친절한지 모르겠다. 누구는 자신이 쓴 100편의 글이 곧 확신으로 다가왔다는데, 나도 그만큼 써야 하는 것인가. 어차피 그렇게 써도, 사람들이 댓글을 남긴다거나 피드백을 주는 것도 아닌데. 별 소용없는 일 같기도 하고. 몰라. 일단 이 글은 내 꼴리는 대로 썼다. 퇴고도 안 할 거고, 여기서 끝. 쓰는데 30분. 좋아, 이런 글도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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