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코트가 잘 어울리네
고흐의 ‘아를의 여인’, 램브란트 ‘책을 읽고 있는 노파’, 미켈란젤로의 ‘쿠마이의 무녀’, 베르메르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책 읽는 여인‘은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소재 중의 하나다.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독서와 여성을 주제로 한 70여점의 다양한 그림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번 초상화의 주인공이자 책 읽는 여인은 내 서귀포 시절, 그곳에서 사귄 친구 혜연이다. 겨울이 시작되는 우중충하고 흐릿한 계절을 지나며 내가 힘들어할 때 비타민D를 권하며 블랙티를 건네줬다. 그녀는 이중섭 거리의 멋진 카페 메이비의 대표이기도 하다.
우리 부부는 4년 전 1년 남짓 서귀포에 살았다. 둘 다 16년 다닌 회사를 휴직하고 퇴사하고, 그곳에서 삶을 모색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곳은 여행지로서, 혹은 은퇴 후의 삶을 꾸릴 수는 있겠으나 40대 초반 지금 살아갈 곳은 아니라는 결론, 우리가 지금 그곳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얻고 육지로 복귀했다.
하지만 내게 서귀포는 언제나 그리운 고향 같은 곳이다. 지난 설 연휴에 오랜만에 서귀포에 머물렀다. 여행이라 하기에는 서귀포 구도심 밖을 벗어난 일이 거의 없어 그저 머무른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오는 연말과 새해도 서귀포에서 보낼 예정이다.
친구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것은 두 번째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초상화의 주인공인 식물집사 해선이 역시 내가 서귀포에 살 때 놀러 왔던 일정 중에 찍은 사진을 활용해 그렸다. 친구와 제주도, 초상화와 제주도일지도.
앞서 식물 집사 친구의 초상화를 그린 뒤, 친구들의 특징이 잘 드러난 초상화를 그려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는데, 마음에 드는 꼭 맞는 책을 든 사진을 찍어 그림을 시작해 볼 수 있었다.
초벌 상태인 자신의 그림을 우연히 보게 된 혜연은 내게 우리의 얄팍한 우정이 이 그림으로 깨지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했다. 그러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인물화에서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끄럽게만 표현되어선 안 된다. 이마는 얼굴 중에서 가장 주름이 덜하고 반지르르한 부위지만 피부 속에는 근육과 뼈가 있는 도톰한 질감을 살려줘야 한다. 가능한 짧은 붓터치로 살려내야 입체감을 잘 살려낼 수 있다. 눈썹과 머리칼도 그 결의 방향에 맞춰 표현해내는 것이 주효하다.
원근감이 거의 없는 책을 든 손은 특별히 표현하기 어려워 애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바스락거리는 책 표지와 두툼하나 부드럽게 떨어지는 모직코트의 질감과 주름을 표현해내는 것은 꽤 재미있었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속눈섭도 절묘하게 그려졌다.
혜연이 든 책은 황석영 작가의 소설 <해 질 무렵>의 영문판이다. 이 작품은 2019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매력적인 표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림을 통해 표현해볼 수 있어서도 좋았다.
언젠가 청주에 출장을 갔다가 여유시간이 생겨 들른 서점에서 ‘오직 하나뿐인 그대’라는 가제가 붙은 <초상화>라는 책을 샀다. 유명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을 포함한 다채로운 초상화 그림과 설명이 담겨 있다.
인물화에 대한 관심이 많은 나는 이 책을 가까이 두고 자주 들춰본다. 인물을 그린다는 것은 마음을 내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 마음이 그려진다는 사실도 신기할 따름이다. 기회가 된다면 인물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인물화를 계속 그려나가고 싶다. 마음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