젯소칠을 하면 뭐가 좋아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뭘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을 그릴지 그 대상을 정하는 마음먹음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유심론인가? (그럴지도)
내 경우 한번 시작한 유화를 마무리하는 데는 작은 사이즈라고 할지라도 최소 3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그림에 따라 다르지만 15호 캔버스도 묘사가 많은 경우 1년 가까이 걸린 작품도 있다. 전업작가가 아닌 직장인을 겸한 탓이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밖에는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그릴지, 어떻게 구성을 할지, 내가 그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려나갈 수 있을지 정하는 것은 그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지 되묻는 것과 같다.
그렇게 충분히 고민하고 스케치를 하고 밑칠을 하고서도 그만 멈추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유화를 시작하기 앞서 그 대상을 먼저 엽서나 수채화로 대상을 스케치하거나 색칠해보기도 한다.
다행히 충분히 사랑할만한 대상을 정했다면, 다음 준비해야 하는 것은 캔버스다. 이제부터는 유물론 관점의 이야기다. 캔버스에 젯소를 칠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물리적인 시작이다.
젯소는 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재료로 아사 캔버스에 애벌 처리를 하는 흰색 물감이다. 실제 유화물감과는 좀 다르지만, 부드럽게 감기는 크림치즈 같은 질감이다. 인테리어 할 때 사용하는 젯소와도 같다.
여성들이 본격적인 색조 메이크업을 하기 전에 피부톤을 조정하고, 화장이 잘 먹게 하려고 BB크림이나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페인트나 물감 칠을 하기 전에 젯소를 바르면 캔버스 면과 물감 간의 접착력을 높여주고, 물감의 착색과 발색에 도움이 된다.
캔버스가 견고해지고 내구성도 높아져 그림을 완성하고 몇 년이 지난 뒤 유화의 표면이 갈라지는 일도 예방할 수 있다. 특히, 캔버스 면의 울퉁한 면을 젯소가 한번 감싸게 되니까 캔버스 면 자체가 매끄러워져서 붓칠 할 때 매끄럽고 색을 선명하게, 일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세밀한 그림을 그리려면 필수적인 과정이다.
요즘 나오는 캔버스는 젯소가 발려있어서 젯소칠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젯소를 직접 바르면 분명히 물감이 잘 발린다. 젯소 칠 안 한 부위를 칠하면 붓도 금방 상할 수 있고, 물감도 잘 발리지 않아, 밑칠에 오일을 많이 쓰게 되기도 한다.
시중에 파는 젯소는 먼저 물과 잘 섞어 줘야 한다. 이론적으로 7:3이라지만, 직접 섞어보면 알게 된다. 물이 많으면 묽어 흐르게 되고, 젯소가 많으면 꾸덕해져서 잘 발리지 않으니까. 젯소 칠을 할 땐, 캔버스의 가로를 한번 칠하고 완전히 마른 것을 확인한 뒤에 세로 방향으로 한번, 다시 가로로, 총 3번 정도 덧바른다.
두 번째 그림을 그릴 때, 급한 마음에 다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두 번째 젯소칠을 한 일도 있는데 그건 좀 망하는 길이다. 캔버스는 얼룩지고 마르지 않은 부분이 움푹 패이기도 하니까. 이런 경우엔 완전히 다 말린 뒤에 사포로 패인 표면을 정리하고 다시 젯소를 칠하면 어느 정도는 회복된다.
그리게 될 그림의 특징이나 작가의 취향에 따라 젯소칠의 횟수나 스타일은 달리할 수 있다. 난 주로 면을 매끈하게 하기 위해 젯소칠 과정에서 붓 자국을 없애고 다 마른 뒤에는 사포칠을 하기도 하는데, 작품에 따라서는 거친 질감 표현으로 위해 젯소를 드문드문 바르거나 표면을 거칠게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유난히 맑은 휴일이면, 깨끗한 캔버스를 꺼내 젯소칠을 한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노래 가사처럼, 깨끗한 붓 하나를 꺼내 색을 칠하듯이. 새하얀 캔버스에 젯소칠을 하면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심경이 되곤 한다.
바닥에는 언제나처럼 어린 시절 우리 집 꽃무늬 식탁보를 깐다. 엄마의 취향이 완연한 이 식탁보를 깔고 젯소칠을 하면 잘 그릴 수 있다는 응원의 메시지마저 느껴지면서 용기백배하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