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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리얼중독자 Mar 22. 2024

도망자

나를 키운 팔할은

“H씨는 회피의 달인이에요, 알고 있죠?”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좁은 방. 심리상담사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하지 않았다.


몇 년 뒤. 1년 넘게 만난 Q와의 관계가 시들해질 무렵, 나는 K를 알게 되었다. 그와 만난 건 클럽하우스 어플에서였다.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모여 대화를 나누던 어플. 나는 K의 소개 프로필에 올라온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 끌렸다.


나는 K가 접속할 때마다 그에게 대화를 걸었다. 우리는 클럽하우스 대화방에서 aespa와 마라샹궈, 뉴진스와 퀴어퍼레이드, 페미니즘과 윤석열, 점심 메뉴와 미국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K는 자신이 미국에 살다가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고 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 동화책을 준비한다고 했다. 며칠 뒤, K는 드디어 동화책이 출간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다음 날 그걸 사들고 K와 만났다. 우리는 K의 집에 가서 자동차 잡지와 미술 도록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음악 얘기를 했다. K는 Blur와 deadmau5를 알려주었고 우리는 같이 <Strobe>를 들었다. 나는 K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갖고 장난쳤고 K는 곧잘 웃었다. 밖이 어두워지자 나는 K와 밤산책을 했고, 돌아온 우리는 졸리다는 핑계를 대며 같이 침대 위에 누웠다. K는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가 나한테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어.”
나는 K에게 입을 맞추었고 K는 눈을 감았다.


“너 만나는 사람은?”
Q를 말하는 걸 테지. 나는 그 관계가 끝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Q의 머리카락은 곱슬거리지 않았다. 동화책을 쓰지 않았고, 아이돌 노래밖에 듣지 않았다. 나는 대답 대신 K를 안았다. K의 몸은 기대했던 대로 따뜻했고, 이국적인 냄새가 났다. K의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Q와 헤어졌다. K의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Q에게 헤어짐을 통보하고, 번호를 차단하고, 문자를 차단하고, 카톡을 차단하고, 친구 프로필을 끊었다.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몇 차례 왔고, 차단 메시지함에는 헤어짐의 이유를 알려달라는 문자가 쌓였다.


그 후로 K와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헤어지고 나한테 오겠다고? 그건 좀 싫은데.”
K는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장난 같진 않았다. 나는 심술이 났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픈 메리지야.”
K는 9월에 결혼한다고 했다. 미국에 있는 약혼자가 9월에 한국에 온다고 했다. 함께 결혼식을 올리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간다고, 그리고 미국에 가서 살 거라고 했다. 그때까진 2달 정도 남아있었다.


우리는 클럽하우스를 했고, 페이스톡을 했고, K의 집에서 자고, 밥을 먹고, 이케아에서 사진을 찍고, 알라딘에 가서 책을 샀다. 나는 밤마다 곧잘 K의 집으로 향하는 야간 버스를 탔고, 아침마다 1시간 일찍 일어나 출근 버스를 탔다.


K는 운전하기를 좋아했다. 나는 K가 운전하는 낡은 경차의 보조석에 앉아 K가 알려준 음악을 틀었다. 우리는 Panic! At the Disco와 AJR과 My Chemical Romance를 들었다. 차를 타고 24시간 맥도날드에 갔고, 주변 농협 마트에 갔고, 드라이브를 갔다. K는 주차를 잘했다.


K의 집은 보일러가 자주 꺼졌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가 함께 달았던 화장실의 샤워커튼을 제치며 “K! 보일러 좀!”하고 외쳤다. 그건 K가 샤워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위치 내리듯 갑자기 꺼져버리는 보일러 탓에, 몸을 씻기 위해 우리는 꼭 다른 한 명이 필요했다.


K는 자주 자신의 애인과 싸웠다. K가 곧잘 애인의 이야기를 하며 짜증을 냈다. “너가 신경 쓰인대.” 나는 조금 우쭐해졌다. 그러나 K는 자신의 애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K는 애인이 진짜 좋은 것 같았다. 둘의 관계가 나아질수록 K와 내가 보내는 시간은 점점 줄어갔다.


1달의 시간이 지났다. 내가 K를 차단한 건 K가 애인과 다시 화해한 날이었다.
“요즘은 사이가 좋아. 주말에는 같이 원격으로 영화 보려구.”
나는 그 말을 듣고 말없이 하하 웃었다. K도 밝은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나는 K와 페이스톡이 끝나자마자 번호를 차단하고, 문자를 차단하고, 카톡을 끊었다. 나는 Q를 생각했다.


K에게서 예상 밖의 연락이 온 건 며칠 뒤였다. 클럽하우스에 접속하자 K에게서 DM이 왔다. 프로필 속 머리카락은 여전히 곱슬거리고 있었다. 왜 연락이 끊어진 건지 모르겠다고, 상처를 받았으면 말해달라고 했다. K가 타이핑 중이라는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나도 상처받았어.]
나는 K의 대화를 삭제했다. K의 프로필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클럽하우스도 삭제했다.


먼저 도망치게 둘 순 없었다.
남겨지는 건 내가 아니어야 하니까.
그렇게라도 말해야 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몇 년 전. 그날의 상담 세션은 1시간이 안되어 끝났고, 상담 치료도 1년이 못되어 끝났다. 대신 몇 년 뒤, 나는 정신과 진료를 받고 약을 먹기로 했다. 나는 곧잘 상담사가 말한 ‘회피의 달인’이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나는 K를 생각했고 클럽하우스를 생각했다. 동화책을 생각했고 deadmau5를 생각했다. 낡은 자동차를 생각했으며, 자주 꺼지던 보일러 생각했고, Q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계속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제목은 김사월의 노래 <도망자>에서 발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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