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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리얼중독자 Jun 18. 2024

두 번째 대학원

T는 대학원을 두 번째 다니고 있다. 입학 1번, 제적 1번 그리고 재입학 1번. T는 지금 복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다. Y대학 캠퍼스에서도 가장 외진 건물의 가장 낡은 복도였다. 복도 창문으로 오후의 햇빛이 들어왔고 공기 중의 먼지들이 반짝이며 부유했다. 눈앞에는 심사를 보기로 한 211호 강의실이 보였다. 강의실의 문은 흰색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고, 군데군데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My Body My Choice, Stop Patriarchy, Go Vegan and Save The World, Yes, I am Queer!
‘너가 얼마나 한심한지 모른다.’ 그가 말했다.
강의실의 여닫이 문이 불규칙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T씨, 들어오세요,” 부심사를 맡은 H교수가 말했다. T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심호흡을 하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페미니스트인 게 자랑이냐.’ 그가 말했다.
강의실 안에는 논문을 심사할 2명의 부심사위원 H교수와 Y교수가 있었고, 1명의 심사위원 J교수가 있었다. T는 자신에게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생수를 따서 타는 목을 축였다. 지도교수인 J교수가 말했다. “자, 그럼, T씨의 석사학위청구 논문의 본심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그가 말했다.
T는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졸업을 할 수 있을까.


“본 논문은 리얼돌과 성산업과의 관계를 다룬 논문이고, 사용자들의 호모소셜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J교수는 잠시동안 졸업논문에 대해 설명했다. 심사위원인 지도교수의 설명이 끝나자 부심사위원 두 명이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T씨가 페미니스트로서 준비가 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논문을 읽어보면 지나치게 객관적인 척하는 남성중심적 시각이 엿보입니다.” Y교수가 말했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주제로 잘 쓴 것 같습니다.” H교수가 말했다.
“연구대상을 관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Y교수가 말했다.
“접근하기 어려운 연구대상이었을 텐데도 연구를 잘 수행한 것 같습니다.” H교수가 말했다.
“인용한 참고문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Y교수가 말했다.
“다양한 문헌을 적절히 참고하여 잘 쓴 것 같습니다.” H교수가 말했다.


“… 본 논문은 리얼돌과 사용자 관계에 집중하던 기존 연구의 관점에서 벗어나 국내 리얼돌 산업의 참여자 사이의 상호관계를 분석하고자 하였으며….”
T는 입으로 논문을 방어하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가 얼마나 한심한지 모른다.” 식탁 위에 마주 앉은 아버지가 말했다.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가 방금까지 들은 페미니즘과 인권과 채식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불살라 버릴 것 같은 눈길이었다.
“이 집에서 나가주길 바란다.”
마주 앉은 T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를 향한 대답을 평생 말대꾸로 알고 자랐으니까.
대신 T는 짐을 싸기로 했다. 그의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으로 돌아가 캐리어를 열었다. 페미니즘과 인권과 채식주의에 관한 책을 담으니 캐리어 하나가 꽉 찼다. T는 옷이 담긴 캐리어 하나와 책이 담긴 캐리어 하나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현관문 앞에는 아버지가 여전히 불타는 눈길로 T를 바라보고 있었다.
“페미니스트인 게 자랑이냐.”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급하게 그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T는 잠시 그가 닫고 들어간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T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왔다.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집을 나올 때 그 말이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 말씀해 주신 대로 연구참여자의 모집이 어려워 모집단이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해 온라인 커뮤니티를 같이 관찰하였고….”
T의 기억은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대학원에 합격했던 때를 기억했다. 카페에서 매니저로 일하던 시기였다. 합격 발표 시간은 오후 5시였지만 출근한 직후 오전부터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마침내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휴대폰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확인했고, T는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앞에서 주문을 기다리던 손님을 깜짝 놀라게 했다.
“죄송합니다!”
연거푸 사과하면서도 미소가 지어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 얻은 첫 성취였다. Y대학 일반대학원 C학과. 알아주는 명문대이면서 페미니즘과 퀴어 연구의 선두를 달리는 곳. 대학원을 갈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미래가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C학과의 건물은 캠퍼스의 가장 외진 건물이었다. T는 건물을 찾아 먼 길을 걸으면서도, 덕분에 캠퍼스의 구석구석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대학원에 입학한 뒤 열리는 첫 오리엔테이션에서 T는 학과 동기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H는 비혼에 대해 연구한다고 했고, Y는 빈곤에 대해 연구한다고 했다. S는 퀴어를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남성 페미니스트에 대해 연구한다고 말을 꺼내자 H와 Y와 S는 좋은 주제인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국내 리얼돌 시장은 중국의 저가 양산형 리얼돌 시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첫 학기가 끝날 즈음, 연구 주제를 전임교수에게 말했을 때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B교수는 학과 내에서 번뜩이는 통찰력만큼이나 뼈아픈 독설로 유명했다. 긴장하고 찾아간 연구실에서 B교수는 T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던졌다.
“T씨가 병아리 감별사도 아니고 남성 페미니스트를 연구해서 뭐 하게요?” 교수가 말했다. “결국 그들을 비판하거나 옹호하거나 하나인데, 그게 연구로서 유효할까요?”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이 아니라 맞는 말이어서. B교수는 잠깐 눈을 맞추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주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T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주제를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B교수도 말했다.
T는 자리에서 일어나 B교수에게 머리를 숙이고 연구실을 나왔다. 다른 연구 주제를 찾아야 했다.


“… 인천세관에 대한 A업체의 승소를 판결한 대법원 판결은 국내 리얼돌 산업에 리얼돌 합법화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 것으로 보이는….”
두 번째 학기가 중반을 지날 즈음 강의시간이었다. “요즘 이슈가 되는 리얼돌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여요.” S가 말했다.
T는 필기를 멈추고 노트북으로 리얼돌을 검색해 보았다. 얼마 전 게시된 인터넷 기사가 나왔다. 초등학교 앞에 리얼돌 가게가 들어서서 문제가 되었다고.
“저도 남성의 욕망에 따라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점에서 리얼돌과 성매매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Y가 이어서 말했다.
T는 Y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었다. 남성의 욕망에 따라 여성의 신체를 제작하고 상품화해서 판다는 점에서 성매매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때의 남성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T가 물었다.
“통제하려는 욕망인 것 같습니다.” H가 대답했다.
H의 주장에도 동의할 수 있었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자신의 욕망과 실천의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리얼돌 사용자는 자신의 욕망과 실천을 극한으로 추구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리얼돌을 연구 주제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T는 리얼돌을 연구 주제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 사용자 커뮤니티는 리얼돌 제작자와 인형체험방 운영자, 리얼돌 사용자 사이의 중심점으로 작용하고 있고….”
세 번째 학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니 H가 있었다. H는 노트북을 켜놓은 채로 노려보고 있었다. T는 인스턴트커피를 타서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요즘 어때요?” T가 물었다.
“연구 주제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이에요.” H가 말했다.
H와 얼마간 연구와 논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연구 주제, 연구 대상, 연구 방법, 참고문헌 그리고 논문 쓰기.
“리얼돌이라는 주제에 대해 써볼까 해요.”
H는 관심을 보였다. 여성에 대한 통제, 성상품화, 성적대상화, 성폭력, 성매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H는 대화를 마칠 때쯤 좋은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T씨는 잘 안 무너지는 것 같네요.” H가 말했다. “ 항상 단단해 보여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게 보인 걸까. T는 H에게 인사를 하고 연구실로 갔다.


“… 리얼돌의 사진을 업로드하고 교환하는 일은 사용자 커뮤니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네 번째 학기. 논문 초안을 전부 살핀 J교수가 T에게 말했다. “저기 혹시 책을 많이 안 읽어요?” 글이 엉망이라는 뜻이었다. 한동안 T도, 교수도 말이 없었다. 교수는 다음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수의 말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교수는 논문을 인쇄한 종이를 내려놓고 말했다.
“저기, 저는 이번 학기에는 T씨가 졸업논문 심사를 안 봤으면 좋겠어요.” 교수가 말했다. “이번에 논문을 낸다고 해도 저는 지도교수로서 거기에 사인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하시겠어요?” 교수가 말했다.
얼마 뒤에 T는 J교수에게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캠퍼스를 걷는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했다.
며칠 뒤, T는 교수에게 다음 학기에 심사를 보겠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래요.” 교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다시 며칠 뒤, 전화가 왔다. 번호를 보니 학과사무실이었다. T는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Y대학교 일반대학원 C학과사무실인데요.” 조교가 말했다. “이번 학기에 졸업하실 거예요?”
“아뇨, 이번 학기는 휴학하고 다음 학기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교가 말 허리를 잘랐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 졸업 안 하시면 제적이세요.” 조교가 말했다.
“제적이요?” T가 물었다.
“이번 학기가 학칙 상 마지막 논문 학기세요. 졸업하실 거예요?” 조교가 말했다. T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대학원 생활이 결정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눈앞으로 대학원 생활 전체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너가 얼마나 한심한지 모른다.’
‘페미니스트인 게 자랑이냐.’
‘너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아뇨.”
“네, 알겠습니다.” 조교가 말했다. 그러곤 전화를 끊었다.


“… 리얼돌에 대한 구매 및 판매 정보와 관리 방법의 공유는 커뮤니티의 주된 자원이며….”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학기. 수업학기수 4, 휴학학기수 1, 기간만료 제적. T가 학과 사이트에 접속했을 때 학사정보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명실상부하게 학과에서 쫓겨난, 아니, 학과를 제 발로 걸어 나간 몸이 되었다.
H교수와 마지막 면담이 잡혀있었다. 연구실에 들어서자 H교수가 있었다. T는 고개를 숙이며 문을 닫았다. H교수는 작업 중이던 것을 멈추고 자리를 권했다. “저, 졸업 안 하려고요.” T가 말했다.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돼.” 교수가 말했다. T는 익숙한 말에 이를 꽉 물었다. 그렇지만 교수는 곧 다른 말을 꺼냈다. “인생은 타이밍이야. 지금 안 하면 언제 하게?”
T는 고개를 들어 H교수를 바라보았다. 교수는 눈을 맞추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처음 T씨를 만났을 때 얘기했죠? 대학원은 인생에 꽤 큰 변화를 줄 거라고.” 교수는 말했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요. 일단 이거 끝까지 하고 나서 다른 거 해.”
T는 잠자코 그 말을 들었다. 교수는 왜 재입학을 해야 하는지, 왜 지금 논문을 끝내면 안 되는지, 어떻게 논문 주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 짧지도, 길지도 않게 설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T는 교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는 그런 T를 따라 건물의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끝까지 해봐요.” H교수가 말했다.
T는 J교수에게 이메일을 썼다. 재입학을 하고 싶다고, 재입학을 위해 지도교수로서 추천서를 써줄 수 있겠냐고. 며칠 뒤 교수에게 답장이 왔다.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만나자는 말을 짧게 적어놓았을 뿐이었다.
며칠 뒤, T는 J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교수가 말했다.
“재입학을 하고 싶습니다.”
“왜요?” 교수가 말했다.
“T씨는 연구가 아니라 그냥 자기가 페미니스트라는 증명을 받고 싶은 거 아녜요?” 교수가 말했다. “그런데 제가 왜 지도를 해야 하죠?”
이때 무슨 말을 했더라. 아무 말을 했던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나. T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며칠 뒤 J교수가 추천서를 보내왔다. 메일에는 짤막하게 적혀있었다. “마지막 기회예요.” J교수가 적었다. “잘해봐요.”


“자, 그럼 심사 결과를 결정할 동안 T씨는 잠시 나가서 기다려주세요.” J교수가 말했다.
여섯 번째이자 다시 첫 번째 학기. T는 복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211호 강의실의 문이 열렸다.
“축하해요, T씨.” H교수가 말했다.
T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H교수는 심사확인서를 달라고 했다. 클리어파일에 끼어있던 심사확인서를 건네자 H교수와, Y교수 그리고 J교수가 순서대로 사인을 했다.
“축하해요, 인간승리네.” Y교수가 말했다. 실패할 것 같았던 주제로 논문을 끝까지 써낸 것에 대한 의미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들었다.
“고생했어요.” J교수가 말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T는 겨우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T는 겨우 대학원을 졸업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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