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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위로

by pahadi

핼러윈이다. 여기저기서 주고받는 사탕과 젤리가 참 마음에 안 든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개째 먹는 거니? 어느 엄마가 단 거 먹는 걸 좋아하겠냐고. 그래도 오늘은 꾹 참아야지. 병원 가는 날이니까.

오늘은 두 달에 한번 대학병원 피부과에 가는 날이다. 4살 무렵 갑자기 아이의 새끼손톱에 까만 점이 생겼다. 사라지길 바라며 4년을 기다렸지만 무럭무럭 커갈수록 까만 점도 함께 자랐다. 동네 피부과에서 대학병원에 가보라는 말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장장 6개월을 기다린 끝에 대학병원 진료를 볼 수 있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지만 제거하길 추천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의 피부과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피부과에 가는 날이 다가오면 아이는 두려움에 밤잠까지 설친다. 레이저 치료가 아프기도 하고 탁탁탁 소리가 공포심을 배가시키는 모양이다. 게다가 레이저 치료실에는 보호자가 동행할 수 없다. 오롯이 홀로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안쓰럽지만 점이 더 커지면 제거하기 어려우니 엄마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번에는 꼼수를 부려 진료 당일까지 병원에 간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다. (나름 배려이기도 하다.) 하교한 아이를 납치하듯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자 난리가 났다. 어쩔 수 없이 만능 치트키를 꺼낸다.

“병원 가서 휴대폰 게임 시켜 줄게!”

아이가 좋아하는 휴대폰 게임. 당연히 자주 시켜줄 수는 없는 휴대폰 게임. 그래서 더 간절한 휴대폰 게임. 휴대폰을 작은 두 손에 꼬옥 쥐어주자 아이 두 눈에 고인 눈물이 쏘옥 들어간다. 현란한 게임 화면 속에 푹 빠진 아이는 다가올 일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오늘따라 대기가 참 길다. 2시간 기다린 끝에 진료를 보고 마취 크림을 발랐다. 앞으로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계속 앉아 있자니 허리도 아프고 챙겨 온 책도 다 읽었다. 몇 시간째 휴대폰 게임 중인 아이도 걱정된다. 이제 그만하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라도 두려움을 잊을 수 있으면 다행인 건가.

드디어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휴대폰을 손에서 떠나보낸 아이는 다시 울상이 되어 덜덜 떨며 레이저 치료실로 끌려 들어갔다. 겁에 질린 아이의 표정을 보자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 게임시켜 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을 스스로 다스리는 방법도 배워야겠지만 아직은 어린아이니까.

아이를 들여보내고 한시름 놓자 우리 앞에 앉은 6살짜리 꼬마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꼬마 아이는 아토피 치료를 받으러 온 것 같았다. 꼬마 아이는 처음이 아닌 듯 공포에 질려있었다. 아는 고통이 더 무섭지.

“엄마, 너무 무서워요.”

“엄마, 얼마나 아플까요?”

“엄마, 저 좀 안아주세요.”

“엄마, 우리 그냥 집에 가면 안 돼요?”

꼬마 아이는 자신의 공포를 쉴 새 없이 말로 쏟아내고 있었다. 꼬마 아이의 엄마는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지친 듯 허공을 보며 괜찮을 거라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층 카페로 향했다. 생각대로 간단한 간식거리도 함께 팔고 있었다. ‘유기농 과일맛 젤리’를 찾아냈다. 이 정도라면 꼬마 아이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꼬마 아이 엄마의 허락 없이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사고 보자!

젤리를 사서 진료실로 돌아오니 아이가 치료를 끝내고 나왔다.

“엄마, 생각보다 별로 안 아팠어요.”

다행이다. 오늘도 이렇게 고비를 넘겼다. 짜잔! 젤리를 내밀자 아이는 신이 나서 깡충거렸다.

“젤리 하나 더 있는데 저기 앉아있는 동생 주고 올래? 동생도 무섭나 봐.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와.”

아이는 젤리를 들고 꼬마 아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엄청나게 큰 형이라도 된 듯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자, 이거 먹어. 형도 진짜 무서웠는데 막상 해보니까 괜찮더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 힘내.”

꼬마 아이는 형의 조언은 귀에 들리지는 않는 듯 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엄마! 저 이거 먹어도 돼요?”

젤리 하나도 저리 흥분하는 걸 보니 아토피 때문에 간식을 제한하는 것 같아 슬쩍 꼬마 아이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데 다행히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형 노릇까지 마친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진료실을 나오고 젤리를 든 꼬마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오물오물 젤리를 먹는다. 꼬마 아이의 엄마도 잠시 쉴 수 있기를. 달콤한 젤리가 아이의 두려움까지 녹여주기를.

젤리가 뭐가 나빠. 이럴 때는 고맙기까지 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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