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내가 번듯한 직장에 목맸던 이야기
나는 금수저가 아니었다.
금수저라기는 커녕, 나와 어머니에게 폭력을 쓰는 아버지와 이를 비관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30대 중반을 지나가는 지금도 떠올리면.. 너무 시리다.
가지고 싶은 악기를 소원한 8살의 나에게도, 외국어 학원을 너무너무 다니고 싶어 보내달라고 조르던 15살의 나에게도, 한결같이 차갑게 돌아오는 '돈 없어'라는 대답이 내게 상처였다는걸 인정하고 일찍 나와 화해를 해야했다. 그 당시 몸에 새겨졌던 기억들이 컴플렉스로 치환돼 핏속으로 녹아들어 온몸 구석구석을 휘감기 전에 말이다.
나는 미술대학을 다녔다.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보니, 미술대학이라는 특성상, 부유한 집의 자녀들이 많다는 것을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다 운발로 이 대학에 입학한 나는 저 친구들과는 시작부터 다르니, 눈길을 주어서 섞일 수도 없을 뿐더러 피해 다니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 벽을 만들었다.
친구들이 과행사며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2000대 초중반의 나는 테헤란로 벤처회사나 서울시청 부근 언론사들을 전전하며 일감 하나라도 따려 내 이력서를 접수하기에 바빴고, 기회를 얻은 뒤엔 회사 실장님들과 프로젝트 납품 기한을 이야기했다. 그 길이 오로지 내가 무시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고, 스스로 돈을 얼마나 벌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내느냐가 내 존재를 인정받는 길이라고 여겼다. 자 봐라, 너희들이 유유자적하는 시간 동안 나는 벌써 자력으로 돈을을 벌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도 유명한 회사들에서.
대학 졸업할 때 즈음이 되었다.
대다수의 미술대학 출신들이 가지게 되는 직업보다는 확실히 좀 더 힘있고 폼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관계 측면에서 가지고 있는 결핍에 대해 깊게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고, 대신 나는 다른 또래 친구들이 갖지 못한, 좀 더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해 더 번듯한 회사, 유명한 회사의 구성원이 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리라.
사회 초년생으로 가졌던 첫 직업은 지상파 방송사의 시사교양국 내 잘나가는 프로그램 취재진으로 근무하는 것이었다. (대학 시절 언론사들을 전전하며 이러저러한 일들을 했던게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내가 했던 일은 프로듀서가 현장에서 취재해 온 내용을 파일링하고, 사전 취재와 리서치를 하는 보조 업무들이었지만 - 취재 대상들이 훗날 장관, 청와대 핵심인사, 국회의원이 되었을만큼 당시로서 진보적 오피니언 리더들을 직접 취재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 사회가 굴러가는 어느 정도 중심 영역에 내가 자리잡고 있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들을 한다는 성취감은 나로 하여금 일에 상당히 깊은 몰입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나는 이 경력을 디딤돌 삼아 남들이 좋다던 신의 직장(공기업)에 경력직으로 취직할 기회가 생겼는데, 개인으로서는 매우 편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직장이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왠지 사회의 변화를 이끌기보다는 세금으로 명분없이 굴러가는 조직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유는 있었다. 그 전에는 방송 제작 환경 때문에 빚어지는 직업 불안정성으로 경제적 자립까지 이루기에 시간이 더디 걸렸다면, 공기업에서는 사내 생활안정자금 대출 및 전세자금대출 제도 등을 잘 활용해 거주문제,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학자금 대출문제를 안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결혼도 이 회사 재직 시절에 했다.
어느정도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 다시 좀 더 힘쎈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
공기업 생활을 4년 남짓 하던 때에, 내가 다니던 방송사 출신의 국회의원실의 시니어 직급으로 취직하게 되는 기회를 얻고나서 '직업이 주는 겉치레' 경험에 획을 긋는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국회에서의 생활을 5년 정도 겪고난 뒤, 직업이라는 굴레는 절대 영원하지 않을 뿐더러, 직장의 힘에 기대어 좀 더 쎄고 좀 더 큰 단위의 일을 하고자 덤볐던 나의 욕망이 내가 가지고 있는 컴플렉스로부터 발현된 것이었다는 점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