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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신임 총경리는 거수기?!

by 다비드

아버지와 기획실장님을 배웅하고 나서 첫 번째 맞이한 아침. 드디어 중국 지사 총경리로서의 진짜 첫 출근이었다.

숙소는 시내의 변두리에 있었고, 회사는 외곽 공업지역에 위치해 차로 20분 정도 거리. 중국 운전면허를 아직 취득하지 못한 상태라 윤경리 차량으로 출퇴근을 해야 했다. 첫날부터 직원에게 신세를 지는 기분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태껏 회사에서 운전기사 노릇만 해봤지 누가 태워주는 차를 타 본 적이 없었으니.

"총경리님, 오늘부터 회사 전반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윤경리가 친절하게 안내해 줬다. 그는 영업과 생산 관리 업무를 모두 총괄하고 있는, 사실상 이 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직원 구성을 다시 정리해 보니 이랬다. 생산직 6명은 순수하게 생산 작업만 수행했다. 회계 직원 1명이 장부와 자금 관리를 담당했고, 고무 제품 생산 및 납품이 주요 사업이며 이를 통해 회사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기술직 2명이었다. 이들은 중국 지사 업무가 아닌 한국 본사의 철강 구조물 제품 설계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고급 설계 업무는 본사 기술팀이 하고, 초급 설계 업무는 인건비가 저렴한 여기서 하는 방식입니다. 향후에는 중국 수출 제품 설계와 기술지원도 담당할 계획이고요."

아, 그런 구조구나. 중국 지사가 단순히 고무 제품만 만드는 곳이 아니라 본사의 설계 업무도 분담하는 곳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우리 회사가 해외 사업장을 활용하여 글로벌 분업 구조를 구축했다는 게 신기했다.

운전기사는 고무 제품 출하 시 운송을 주로 담당하고 가끔 장거리 출장도 수행한다고 했다. 그리고 요리/청소 담당 아주머니 직원 1명이 직원 점심 식사와 사무실 청소를 담당했다.

"아주머니 음식 솜씨가 정말 좋아요. 드실만하실 거예요."

정말 그랬다. 첫 점심부터 감탄. 제품 운송과 청소를 외주 주지 않고 직접 고용해서 실행하는 것도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었는데, 중국에서는 대부분 그렇다고 했다. 이 작은 회사에 운송 트럭과 기사, 식당과 찬모까지 운영하는 게 맞나 싶었다.

465619002_9619044348110536_3922256899408803800_n.jpg 매일 구내식당에서 중국 장쑤성 가정식 섭취

중국 지사는 고객사인 한국 대기업 지사에 납품하는 고무 제품 매출이 유일한 현금흐름 창출원이었다. 그런데 매년 거의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만 들었다. 2013년, 2014년 재무제표를 받아서 봤다. 이익이 거의 없다는 것은 알겠는데 뭐가 문제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재무제표나 장부를 분석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중국 지사에 오기 전에 나름대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개요를 정리했었다. 10년 전, 딱 이렇게 작성해서 이메일로 보냈던 걸 찾아냈다.

1. 직원 정보 파악: 근속연수, 월급여, 재계약일정, 나이, 직급, 담당업무, 업무능력, 인성, 특이사항
2. 업무 프로세스 파악
- 주요업무: 영업, 입찰, 계약, 입고, 생산, 출하, 매출, 수금
- 관리업무: 설비 투자/보수/관리, 원/부자재 구매 및 재고관리, 외주용역관리, 회계
- 기획업무: 신규영업, 신규구매, 제품개발, 인사관리, 행사기획, 중국사업지원, 문서관리
- 기타업무: 공장임대관리, 업무보고, 총무지원, 본사출장지원
3. 핵심 업무 분석
- 원가/판가 구조 분석, 원가/판가 산정 체계 수립, 원가절감방안 도출
- 품질악화요소 분석, 공정개선안 도출, 품질향상을 위한 도구 제작
- 영업대상 및 영업성공요소 분석, 신규영업처 발굴

지금 보니 나름 이것저것 고민하긴 했지만 그냥 뻔한 개념적인 내용의 나열인 거 같다. 실제로도, 당시에 막상 와서 보니 크게 쓸모가 없었다.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우선 제품에 대해 알아야겠다.'

며칠은 공장에서 생산 작업을 지켜봤다. 고무 원료를 배합해서 가황기에 넣고 쪄내는 공정. 보기에는 단순해 보였다. 하지만 원가 절감이나 품질 향상을 위해서는 뭘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딱히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제품에 대한 기본 이해가 부족하니 생산 공정을 계속 봐도 뭔가 떠오르는 건 딱히 없었다. 솔직히 지루했다.

회사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최근 3년간의 주간보고, 월간보고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그런지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 품질 이슈 발생', '△△ 원자재 가격 상승', '□□ 설비 점검 완료' 같은 내용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이 회사에 어떤 의미인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 앞서 다녔던 두 회사에서도 처음에는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감이 오지 않는다고 공부를 미루거나 요령을 피울 게 아니라 반복해서 자료를 살펴보고 일을 하다 보면 조금씩 머리에 들어왔고 6개월 이내에 내 일이 자리를 잡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466043934_9653431481338489_2147159348487757482_n.jpg 잘 안 보이지만 천천히라도 계속 오르면 닿겠지

본사에서 지시한 중국 지사 개선 업무 리스트가 있어서 우선 그것부터 착수하기로 했다. 초기 며칠은 그 리스트의 내용을 윤경리와 같이 파악하고 실행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주로 했다. 하지만 잘 모르는 경영자가 실무자를 피곤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초기에는 윤경리의 보고와 계획을 대부분 그대로 승인했다.

"이렇게 진행하면 될까요?"

"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사실 좋은지 나쁜 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현장을 아는 사람의 판단을 믿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첫 주가 지나갔다. 뭔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뭘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 상태였다. '총경리'라는 직책은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쯤 진짜 총경리다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무 제품 사업을 총괄하는 '총경리'로서의 역할은 공부와 경험이 필요했기에 일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총경리' 외에도 나에게 주어진 중요한 역할이 금세 드러났다. 바로 한국 본사의 '중국 지사장'으로서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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