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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안녕하세요 총경리입니다

니하오 워 쓰 종징리 쩡종

by 다비드

8일간의 교육이 끝나고 드디어 중국으로 출국하는 날. 아버지, 기획실장님과 셋이 함께 상하이로 향했다. 두 분은 나를 현지에 정착시키고 돌아오실 예정이고, 나는 중국 지사에 남아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는 일정이었다. 비행기에서 아버지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 주셨다. 1개월에 한 번씩은 주말 포함 4~5일 정도 한국 출장을 와서 안양 사무실에 출근하라고. 본사 직원들과 교류하고 협업도 하고, 무엇보다 최소한의 신혼 가정생활을 하라는 취지였다.

"아직 신혼인데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안 되지."

아버지다운 배려였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이라니, 생각보다 자주 집에 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상하이 공항에서 차로 2~3시간을 달려 중국 지사가 있는 소도시에 도착했다. 이 지역에 진출한 국내 대기업을 따라 진출한 협력업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우리 중국 지사도 그중 하나.

중국 지사에서 첫 번째로 공부할 부분은 사업 분야였다. 본사에서는 철강 제품을 다루는데, 중국 지사는 고무 제품을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었다.

"고무요? 고무 제품이요?"

철강도 제대로 모르는데 고무는 더 모르겠다. 그나마 본사의 철강 제품은 오래전부터 대강은 알고 있었는데 고무는 영 막막했다. 공장 교육 때 공장장님이 두꺼운 책을 하나 주시면서 "정이사는 똑똑하니까 이거 보고 공부하면 충분할 거야"라고 하셨는데, 펼쳐보니 온통 모르는 내용뿐이었다.

'고무의 물성', '가황 공정', '첨가제의 종류와 특성'...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기엔 별로 읽어보지도 않았다(...).

465793053_9640489645966006_7854358784441149857_n.jpg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2)

중국 지사 구성원을 소개받았다. 중국어가 능통한 한국인 관리자 1명, 나머지는 모두 중국인으로 생산직 6명, 기술직 2명, 회계/총무 1명, 운전기사 1명. 총 11명의 작은 조직이었다.

내 직급은 총경리. 한국의 사장이나 대표이사에 해당한다고. 한국인 관리자는 경리라는 직급이 있었다. 한국처럼 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이사/상무/전무/사장/회장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지 않고 좀 더 두루뭉술한 느낌.(써놓고 보니 한국은 직급이 참 많다.) 간단히 설명을 들어보니 대략 이런 직급 체계였다.

동사장: 회장, 오너 경영인
총경리: 사장, 대표이사
부총경리/총감: 임원
경리: 과장~부장
주임: 대리~과장
직원: 사원

"한국 사람들은 정사장이라고 부르고, 중국 사람들은 쩡종이라고 부를 거예요."

우리 한국인 관리자 직원인 '윤''경리'가 알려줬다.(윤경리의 우리 회사 직급은 과장) 총경리가 중국어 발음으로 종징리인데, 보통은 성을 붙여서 'O종'이라고 부른다고. 정사장이든 쩡종이든 어색하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정사장보다는 쩡종이 나았다. 생소한 호칭이라 오히려 부담이 없달까. 전 직장에서는 막내 대리였는데 갑자기 사장이라니. 더군다나 아래 직원들을 다뤄본 적도 없는데 외국인 직원들의 관리자라니 더욱 어색하고 난감했다.

첫날 저녁에는 전체 직원들과 회식을 했다. 중국 음식점에서 원탁에 둘러앉아 건배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설픈 중국어로 인사를 하니 직원들이 박수를 쳐줬다.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정말 이 사람들의 총경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도 비슷하거나 더 많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리고 중국어도 못 하고 중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고무 사업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단지 사장님 아들이라고 총경리 역할을 할 수 있을까.

466068486_9653431461338491_1108316231200293555_n.jpg 앞날이 보이지 않아요

둘째 날에는 아버지, 기획실장님, 윤경리와 함께 고객사를 방문했다. 국내 대기업의 중국 지사였는데, 그곳 지사장도 총경리였다. 하지만 회사 규모는 우리와 수백 배 차이가 났다. 고객사 총경리는 나이 지긋한 중역이었고, 나는 갓 입사한 신입 총경리.

"젊은 총경리가 오셨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덕담을 주고받으며 저녁 식사를 했지만, 같은 총경리라는 호칭이 무색할 정도로 격차가 느껴졌다. 전 회사에서도 직급에 비해 중역들을 많이 대하는 업무를 해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장상사와 고객사로서의 중역은 완전히 다른 느낌. 훨씬 어렵고 부담스러웠다. 아마도 아버지가 같이 오지 않았으면 이런 작은 협력업체를 만나주지도 않았을 터. 아는 게 없으니 회사 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도 않았(못했)고,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느 회사에서 일했었고 그런 신상에 대한 이야기만 나눴다.

셋째 날, 아버지와 기획실장님이 출국하는 날이었다. 공항까지 배웅을 하고 혼자 아무도 없는 숙소에 들어서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 진짜로 중국 지사 총경리로서 생활이 시작되는구나.'

철강도 모르고 고무는 더 모르고, 중국어도 못하고, 직원 관리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도 외국 땅에서 혼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연고 없는 타국 땅, 방 2개가 딸린 넓은 빌라에 불이 꺼진 채 혼자 누워있으니 정말 적막했고 막막한 기분이 일었다. 어제는 그래도 아버지가 숙소에 같이 계셔서 그런 기분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해봐야 아는 거지, 뭐. 그렇게 나의 본격적인 중국 지사장 생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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