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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남이 Jul 11. 2021

그냥 생각이 나는 거지.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고.

'커피'하니 생각나는 이야기

   'ㅁ'동에 살던 시절, 집 5분 거리에 '브라운 칩'이라는 작은 동네 카페가 있었다. 동네 카페답게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었고, 동네 카페 답지 않게 전문적으로 커피를 하는 곳이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커피 볶는 기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사장님은 주로 기계 앞에 몸을 구기고 앉아서 손님을 맞으셨다. 왼쪽 진열장에는 각종 드리퍼들이 제멋대로 쌓여 있었고, 그 왼쪽 큰 책장에는 글보다 그림이 많은 책들이 시리즈 별로 꽂혀 있었다. 카페 정면에는 가지가 무성한 조화 나무도 한 그루 있었다. 나뭇가지 아래에는 꿀단지 크기의 유리병 30개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브라운 색으로 볶아진 원두가 각 나라별로 구분되어 들어가 있었다. 좁은 공간에 자잘한 카페 살림살이들이 빈틈없이 들어가 있는 모양이 마치 'ㅁ'동 우리 집 같았다.


   우리 집은 88 올림픽 때 지어진 낡고 오래된 소형 아파트였다. 그곳에서 동생과 함께 12년을 살았다. 함께 지내온 크고 작은 물건들이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며 집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 땐 '물건들이 사는 집에 우리가 얹혀사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리 닦아도 세월의 얼룩은 지워지지 않아서 청소를 해도 보람이 없었다. 2년짜리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다음번엔 나갈 거라는 생각 때문에 바닥도 도배도 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우리도 얼룩만 보탰다. 이 집은 뭘 해도 좀 구질구질한 기운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원두를 사러 브라운 칩에 들렀다. "어떤 원두 찾으세요?" 사장님이 커피 볶는 기계에서 유리병 쪽으로 걸어오며 말씀하신다. 고작 다섯 걸음 정도면 충분한 거리다. "산미가 덜한 커피요. 클리버에 내려 먹으려고요."라고 대답하면 사장님은 몇 가지 커피를 추천해주셨다.



  "첫 번째 원두는 인도네시아 만델링 원두예요. 이건 산미가 거의 없어서 아주 묵직하고요. 보통 인스턴트커피들이 산미가 거의 없는 원두를 써요. 두 번째는 케냐의 원두인데 이건 산미가 조금 있어요. 어떤 느낌이냐면... 자몽 아시죠? 자몽은 쌉쌀한 맛이 있잖아요. 마지막에 그런 맛이 나요. 그래서 상큼한 느낌을 주기도 해요. 세 번째는 과테말라의 벨라 카르모나라는 커피인데 이 원두는 다크 초콜릿의 쌉쌀한 산미가 있어요. 벨라 카르모나라는 건 농장 이름인데 과테말라에서 굉장히 크고 유명한 농장이에요. 옛날에는 유럽 사람들 기준에 맞는 커피 퀄리티가 중요했거든요. 그 기준을 만족하는 농장이었죠. 지금은 많은 농장이 비슷한 수준을 내고 있지만 그때는 몇 개 없었어요. 그래서 그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곳이죠. 한국 사람들이 과테말라 커피를 좋아해요."



   커피를 팔기에 적합한 목소리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사장님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부드러운 음률로 설명해 주시는데 마치 구연동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여기서 원두를 사 가지고 오는 날은 삶이 조금 우아해지는 기분이었다. 꾸질한 우리 집에도 근사한 과테말라의 고급 커피 향이 퍼지고 있었으니까.


   브라운 칩은 이제 그 자리에 없다. 나도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는다. 낡고 소중한 우리의 보금자리가 있던 동네는 이제 재개발에 들어간다. 카페는 자리를 옮겨 더 널찍한 자리에서 새롭게 오픈을 하였다. 블로그로 사진을 보았는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련된 느낌의 공간이다. 공교롭게도 나 또한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 둘 다 이전보다 나은 환경으로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ㅁ'동 시절은 단짠단짠 한 기억이 많은 시절이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을 온전히 그곳에서 보냈다. 지긋지긋하기도 했지만 낭만으로 포장돼 추억할 이야기도 많은 곳이다.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도 원두를 사다 먹고 있지만 아직 커피 이야기를 해 주는 사장님은 만나지 못했다. 아마 감미로운 목소리의 카페 사장님도 이제는 손님 한 명 한 명과 커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카페가 너무 크다고 느끼시지 않을까. 어쩌면 가장 짠짠한 시절이 가장 달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다. 그냥 그 동네의 공기가 가끔은 생각이 나겠지. 그냥 집구석구석에 과테말라 커피 향이 가-득하던 그 시절 말이다.



+ 사장님은 미술을 전공하고 전자제품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하다 돌연 퇴사를 결정. 짐을 싸서 커피를 공부하러 세계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지금 보니 사장님은 참 철이 없는 사람이었다. 커피가 좋아서 아프리카까지 다녀온 사람이 최준 말고 또 있었다니. 사장님이 원조라고 감히 얘기해 본다. 디자이너 출신의 재능을 살려 사장님은 원두를 담아주는 브라운 봉투에 매번 다른 그림을 그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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