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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남이 Aug 01. 2021

하뭇한 그 여름 기억

‘고무’하니 생각나는 이야기

뜨거운 여름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최근 몇 년 간 이렇게나 더운 여름은 참 오랜인 것 같다. 작년에는 비가 많이 내렸고, 코로나 이전은 ‘여름엔 사무실이 최고지’라며 에어컨 빵빵한 회사에서 담요를 둘러가며 일했다. 근래의 하늘은 연일 감동이기까지 한데, 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작품처럼 걸려있다가 해가 질 때는 라라 랜드 색감을 선사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오랜만에 여름휴가가 간절해지는 날씨를 만났지만 현실은 재택이거나 집콕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그 여름’이 생각난다. 그때의 하늘과 바람과 온도와 습기가 지금의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다고 느낀다. 선명한 구름에 깨끗한 하늘, 직사광선 햇빛에 나무 그늘이 선명했던 그 시절의 여름.


둥근 해가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이를 닦고, 세수할 때는 깨끗이 이쪽저쪽 목 닦고, 머리를 빗고 옷을 고른다. 햇볕에 바싹 말라 색이 약간 바래진 면 티셔츠에 무릎 위로 올라오는 반바지를 골라 입는다. 꼭꼭 씹어 밥을 먹고, 가방 메고 인사하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마지막에 꼭 챙겨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전날 미리 얼려 둔 얼음물이다. 꽁꽁 얼은 PET병을 손수건에 돌돌 싸서 책이 젖지 않게 가방 한 구석에 푹 찔러 넣는다.


그늘과 햇볕이 교차하는 가로수 길을 20분 남짓 걸어 학교에 도착한다. 가방을 멘 어깨가 살짝 축축하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PET병을 꺼낸다. 아직 얼음이 거의 녹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혀서 몇 방울의 물로 간신히 목을 적신 뒤 물통을 마구 비비거나 흔들어 댄다. 물이 빨리 녹았으면 좋겠다. 교실 벽에 붙은 선풍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지만 이번 주 내 자리는 바람이 닿지 않는 자리다. 손에서 책받침을 놓지 못하고 연신 손바람을 만들어 댄다.


드디어 점심시간이다. 점심을 최대한 빨리 먹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운동장으로 뛰어간다. 오늘은 옆 반과 고무줄 대항전이 있는 날이다. 적당히 그늘이 있고, 바닥이 고르고, 남자아이들의 축구공이 날아오지 않는 명당을 선점해야 한다. 오늘은 내 고무줄을 사용하기로 했다. 지난주에 문방구에서 새것으로 사 왔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가다 보면, 장난감 기차가 과자와 사탕을 싣고서,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고 고기들이 왔다 갔다 하는 바다에 도착하면, 바다의 왕자 마린 보이 푸른 바다 밑에서 잘도 싸운다.(전우야 잘자라, 장난감기차, 여름 냇가, 마린보이) 알고 보면 고무줄놀이가 대단한 것이 노래를 부르면서 박자에 맞춰 계속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가슴보다 높이 걸려있는 고무줄을 안으로 밖으로 넘나들면서. 어쩌면 걸그룹의 모태가 아닌가 싶다.


이제 옆 반이 노래를 부르며 뛰어다닐 차례다. 까만 고무줄을 손으로 바짝 잡아당기고서 옆 반 친구들이 고무줄을 건드리지는 않는지, 박자는 잘 맞추는지 매의 눈으로 지켜본다. 오늘은 꼭 이기고 싶다.


오후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교실로 들어온다. 아침에 싸온 얼음물은 벌써 다 녹아 버렸다.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면 물이 미지근해진다. 아침에 물이 빨리 녹았으면 했던 마음은 온데 없고 ‘내일은 더 꽁꽁 얼려와야지’라고 다짐한다. 오늘은 반장 엄마가 교실로 ‘더위 사냥’을 보내왔다. 가운데 종이를 잘 발라내고 짧은 쪽 껍질을 위로 잡아당긴다. 반으로 뚝 자르는 건 멋이 없다. 한 손에 칼처럼 쥐고 먹어야 더위를 사냥해 볼만 하다.


끈덕끈덕 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다. 엄마는 얼른 샤워부터 하라고 성화다. 따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면 활짝 열어둔 현관문 쪽에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문에 치렁치렁 달아둔 발의 구슬들이 바람에 톡톡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에 물기를 대충 닦고 나와 선풍기를 바짝 당기고 앉아서 회전을 고정으로 바꾼 뒤 선풍기를 독차지한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수박을 꺼내 베어 물면 여기가 북극이다. 그러나 북극도 잠시, 뜨거운 밥에 칼칼한 김치찌개를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으면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 안쪽으로 목을 타고 땀이 다시 주륵하고 흐른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조금이라도 땀이 날 새라 뛰는 법이 거의 없다. 밥 먹을 때도 에어컨은 필수가 됐다. 그래서인지 섬세하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비해 그 시절 선풍기의 투박한 바람이 어쩐지 더 아련하면서 하뭇한* 기분이 든다. 땀이 흠뻑 났지만 건강했던 그 여름, 짙을 대로 짙어진 한여름의 나무처럼 몹시 여름다운 여름이었다.


그러다 뉴스에서 연일 폭염이라는 기사가 쏟아지고 쪽방촌의 힘겨운 여름을 마주하게 되면, 에어컨이 흔하지 않은 삶은 아직 현재 진행형인 것을 실감하게 된다. ‘에어컨 없이 어떻게 살았지’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직 현실이기에, 턱 아래 끈적하게 붙어 있는 땀을 그저 조용히 밀어내 본다. 어느 때보다 뜨겁고 짙은 여름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하뭇하다 : 마음에 흡족하며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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