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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렉스 Dec 23. 2022

디지털 계약법이 필요하다

scene #1: ‘이거 업데이트 하면 너무 느려지지 않을까?’

2013년 쯤 구입한 오래된 아이패드가 있다. 배터리가 좀 짧아지긴 했지만 아직은 잘 작동하고 화면도 선명하다. 가끔 최신 운영체제로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하라는 알람이 온다. 알람이 올 때마다 잠깐씩 고민이 된다. ‘옛날 기계인데 최신 프로그램이 잘 돌아갈까? 업데이트 하면 너무 느려지지 않을까?’ 

운영체제를 업데이트 했다가 너무 느리거나 하는 등 문제가 생기면, 이전 버전으로 낮춰서 설치 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보관된 데이터나 기록들이 실수로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관련 기사: ‘아이폰 맹점’에 타블로도 당했다 “10년간 쓴 가사 모두 삭제” 


scene #2: ‘저기요, 이거 뭐라고 불러야 돼요?’

최근 TV에 자주 보이는 광고가 있다. 우리나라 가전 제품의 양대축이라 할 수 있는 삼성과 엘지 모두 동일한 메세지를 시청자에게 던진다. 엘지는 ‘쓸수록 좋아지는 가전, 당신에게 맞춰 더 좋아지는 가전, 핸드폰 앱이 스스로 업데이트 하듯이 가전 제품의 소프트웨어를 자동 업데이트해서 항상 최신의 기능을 제공하는 가전’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사용자가 애완동물을 새로 키우게 되면 가전 제품이 애완동물의 등장을 감지하고 이에 맞는 기능을 제공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자동으로 업데이트 하여 애완동물 케어와 같은 기능이 무료로 추가된다는 설명이다. 이름은 UP 가전이라고 붙였다. 삼성은 ‘가전을 나답게’라는 제목으로 AI 분석을 기반으로 사용자별 맞춤형 기능을 제공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새로운 기능을 쓰려면 새 가전을 구입하는 방법 밖에 없었던 사용자 입장에서는 자동 업그레이드가 되면 무척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좋은 점만 있을까? 또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한 기능 추가로 정말 가전 제품 구입 주기가 길어질까?

가전 제품은 자동 업그레이드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제공하는 기능이 많다. 냉장고도 단순히 음식물을 시원하게 보관하는 기능 뿐 아니라 용도별 온도 제어, 성애 제거, 탈취, 정수 등 부가 기능이 많다. 가전 제품들은 출시 이전에 충분한 테스트를 거치고, 출시 이후에 발생하는 오류나 오작동에 대비 하기 위해 AS (사후 관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자동 업데이트 환경이 되면 테스트를 충분히 하기 어려워 진다. 거기에 덧붙여 사용자 가정 환경별 맞춤형 업데이트가 일어난다면, 테스트를 해야 할 환경의 가짓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상황을 모두 출시 전에 대비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쌓아둔 털실 뭉치를 애완동물로 착각하여 필요 없는 기능을 추가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또 소프트웨어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소프트웨어만 업데이트 하는 것은 하드웨어의 제어 방식이나 전자 회로의 계산 방식을 바꾸는 정도에 그친다. 애완동물 케어 기능이 공기 청정기의 작동 시간이나 작동 주기, 작동 강도를 바꾸는 정도로 대응 가능 하다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기능 추가가 가능 하겠지만, 알레르기 물질을 걸러내는 새로운 필터가 필요하거나 털을 잡아내기 위해 정전기 필터를 바꿀 필요가 있다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뜻이다.

관련 기사: 두 번 사지 말고 ‘UP 가전’ 하세요… 가전 업그레이드 약속한 LG


scene #3: ‘어, 이제 그 기능 쓸 수 없나요?’

현대 자동차와 카카오 AI 서비스가 협업하여, 현대 자동차 주행 중 카카오의 AI 기반 음성 인식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 메세지를 보내거나 받은 메세지를 읽어주도록 요청하기, 일정 등록이나 메모 등이 가능하다. 주행 중 시선과 손이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운전이 더 편하고 안전하게 된다.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제공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다수의 운전자가 익숙하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무료 서비스다. 

다만 아쉬운 점은 무료 서비스이기 때문에 언제든 제공이 중단 될 수 있고, 사용자는 서비스 중단에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관련 내용: 현대자동차그룹 x Kakao i – 카카오톡 편


데이터와 AI 서비스는 우리 삶을 많이 바꿔놓고 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뿐 아니라 가전이나 자동차 등 전자 제품의 범위가 넓어지고, 전자 제품의 작동에 소프트웨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전자 제품의 정체성이 바뀌고 있다. 가전 제품도 마찬가지다. 엘지 광고에도 나오는 표현처럼, 우리는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렇게 변화 중인 가전 제품이 여전히 ‘가전’으로 간주해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의문을 갖는 것처럼 법률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전자 제품의 구입과 안정적인 사용에 대한 사용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은, 옛날 방식의 전자 제품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 같이, 전자 제품이 오래 되어서 최신 소프트웨어를 작동 시키킬 성능이 안 되는 경우 사용자는 이를 제품의 기능 불량이나 오작동으로 주장 할 수 있을까? 사용자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일어난 소프트웨어 자동 업데이트가 오류를 일으키거나 의도하지 않게 작동되는 경우 사용자는 제조사에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무상으로 제공되던 음성 인식 서비스가 안전 운전을 위해 필수적인 기능이 되었으나 어느 날 제조사의 사정으로 인해 제공이 중단될 경우 사용자는 어떤 법적인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이 모두가 현재 우리 법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유럽, 특히 독일은 이런 측면에서 고민의 정도가 많이 앞서 있다. 전자 제품의 작동 요소 중 일부가 소프트웨어인 경우도 ‘디지털 프로덕트’라는 이름으로 법에 정의 했다. 또 디지털 프로덕트의 안정적인 사용을 위한 사용자의 권리를 법에 포함 시켰다. 

제조사가 전자 제품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전자 제품의 수명을 짧게 가져 가도록 유도 할 수도 있고, 자동 업데이트나 개인화 기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주기적인 관리 서비스나 케어 서비스 제공을 유/무료로 실시 할 수도 있다. 무료 서비스의 제공 개시나 중단 시 사용자의 의견을 반영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제조사와 사용자 간의 정보와 힘의 불균형이다. 제조사가 제시 하는 해결 방법들이 공정하고 합리적인지 고민과 점검이 필요 하다. 또 사용자를 보호 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의 마련과 적극적인 제안, 감시가 필요 하다. 우리 스스로를 위해, 디지털 계약법이 필요한 이유다.


이 글은 '세상의 모든 문화'에서 발송한 뉴스레터 '일상 속의 IT 기술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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