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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린레이 Jan 18. 2023

<돌아가는 펭귄드럼> 리뷰와 해석: 살아남기 위한 전략

이쿠하라 쿠니히코의 <돌아가는 펭귄드럼>(2011) - 생존~~ 전략~!


미디어: 애니메이션 TV

제작: 브레인즈 베이스

감독: 이쿠하라 쿠니히코

제목: 돌아가는 펭귄드럼 (돌아가는 핑드럼)

장르: 드라마, 미스터리, 초자연

방영일자: 2011 3분기

편당 러닝타임: 24분

화수: 24화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시작부터 이상했다. 생존전략을 내내 외치질 않나, 말하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픽토그램화가 되어있질 않나, 운명이니 사과니 똑같은 말을 계속하질 않나.


A : "사과는 사랑에 의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에게 주는 보상이야"
B : "그래도 죽으면 다 끝이잖아"
A : "끝이 아니야, 오히려 거기서 시작한다는 게 켄지의 주장이야"
생존~~~ 전략~~~~!!

  

 그런데 그런 이상함들이 나를 엔딩까지 이끌었다. 도대체 운명이란 게 뭐지? 사과는? 생존전략은? 메타포의 투성이었다. 이것들을 계속 반복해서 보여주면서 끝까지 답을 주지 않다가 엔딩에 다다라서야 각각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려주더라. 그런데 각각의 의미도 알겠고 중요한 것도 알겠는데 이것들을 연결해 보려니까 '그래서 이것들이 뭐지?'라는 의문만 떠올랐다. 뭔가 똥작이라기에는 중요한 떡밥들은 다 회수하면서 큰 메시지를 던져준 것 같기는 한데, 명작이라기에는 내가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돌아가는 펭귄드럼> 방영 종료 후 반응이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감명 깊다라는데 나도 심히 공감한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을 보고 나니 뭔진 모르겠는데 굉장히 갑갑해져서 나는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엔딩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해보려 한다.


 이 밑부터는 스포일러 투성이니 <돌아가는 펭귄드럼>을 보고 오는 것을 추천한다.




운명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히마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칸바와 쇼마는 운명에 의해 죽어야만 하는 히마리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이 외에도 <돌아가는 펭귄드럼>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게 된다.


난 운명이라는 단어가 싫다. 잘 사는 가정에 태어나는 사람, 기아나 전쟁 한복판에 태어나는 사람. 그것들이 전부 운명이라면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태어나는 것일까? 신이라는 작자는 너무나도 불합리하고 잔혹하다.


 운명의 선택을 받은 아이들과는 다르게 선택받지 못한 아이들은 어린이 브로일러에 갇혀 존재가 소멸(투명)하게 된다. 그렇기에 쇼마는 운명이란 단어를 싫어하며 운명을 만들어 낸 신은 너무나도 불합리하고 잔혹하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는 선택받지 못한 아이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 바로 생존전략이다.


생존전략

 <돌아가는 펭귄드럼>에 등장하는 생존전략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사네토시가 속해 있던 KIGA의 계획이다. 사네토시는 운명을 상자에 비유하며 모든 사람들은 상자에 갇혀있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상자를 부수는 것만이 운명이란 불합리한 시스템을 타파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KIGA는 상자를 부수는 방법으로 다름 아닌 지하철 테러를 선택한다. 아마 정해져 있는 운명이 존재하는 사회를 없애버리는 것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두 번째는 운명을 바꾸는 주문인 운명의 과실(사과)을 함께 먹자를 외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는 주문을 외우는 당사자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모카는 자신의 몸이 희생되는 것을 대가로 케이주와 유리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운명의 장난인 것처럼 <돌아가는 펭귄드럼> 내에 등장하는 두 가지 생존전략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음에도 서로를 저지하려 한다. 모모카는 KIGA의 지하철 테러를 저지하려 하고, 사네토시는 모모카의 주문을 방해하려 한다. 모모카는 다행히 지하철 테러의 피해는 최소화시켰지만 사네토시의 방해로 의해 자신의 존재가 두 개의 모자로 바뀌어 버린다.

 두 개의 모자는 각각 타카쿠라 히마리와 나츠메 마리오에게 떨어지게 된다. 둘 다 죽을 운명이었지만 모자의 힘 덕분에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 두 명에게 모자가 주어졌을까? KIGA의 주요 인물이 다름 아닌 타카쿠라 부부와 나츠메의 아버지인 것을 보면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엔딩

 엔딩에 다가가며 칸바는 쇼마에게, 쇼마는 히마리에게 운명의 과실을 나누어 준 사실이 드러난다. 또한, 작중 내내 언급되던 핑드럼은 다름 아닌 칸바가 쇼마에게 나누어준 과실이다. 마지막 화에서 쇼마는 칸바와 히마리에게 자신들이 만났던 이유를 알겠다고 하며 자신이 받았던 과실을 칸바에게 다시 돌려준다. 도대체 이 행동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이제 알았어. 그때 우리가 만난 이유를. 이때를 위해서였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링고는 모모카와 같이 칸바와 사네토시가 꾸몄던 KIGA의 계획을 막기 위해 운명을 바꾸는 주문을 외우게 된다. 그 대가로 링고는 온몸이 불타게 된다. 운명의 열차는 떠나려고 한다. 칸바는 히마리를 열차에 두며 자신은 소멸하게 된다. 쇼마는 링고를 안아주어 대가를 대신 치러 링고를 열차에 두게 된다. 히마리와 링고를 태운 채 운명의 열차는 출발하였다. 그리고 칸바와 쇼마는 그대로 소멸하게 된다.


해석

 나는 타카쿠라 형제가 과실을 나누어준 대신 히마리의 죽음을 대가로 받았다고 생각한다. 쇼마가 칸바에게 운명의 과실을 돌려준 것은 히마리의 죽음을 없던 일로 돌리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타카쿠라 삼남매가 과실을 나누었고 그 대가로 히마리의 죽음을 받았던 인과를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라고 칭하겠다.


 운명의 과실을 돌려주는 것은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를 시작하는 첫 번째 단추였던 '칸바가 쇼마에게 과실을 주었다'라는 사실을 없애는 것이다. 즉,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칸바가 쇼마에게 운명의 과실을 주지 않은 것으로 사실이 변하면서, 쇼마는 어린이 브로일러에서 존재가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쇼마는 히마리에게 운명의 과실을 주지 못했을 것이므로 타카쿠라 삼남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히마리는 죽지 않아도 되고 칸바와 쇼마는 자신들이 사랑하는 히마리의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본다면, 칸바가 쇼마에게 과실을 넘겨준 행동은 무의미해 보인다. 더군다나,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보다 더 불행해 보인다. 히마리뿐만 아니라 쇼마까지 소멸하는 엔딩이니까. 그러나, 쇼마는 자신들이 만났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쇼마가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를 지금 자신들이 서있는 운명의 열차에서 없애는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운명의 열차에서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를 없애는 것이 중요할까? 만약 운명의 열차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를 없앤다면 위에서 설명했듯이 쇼마와 히마리는 의미 없이 이 세상에서 소멸하게 된다. 그러나, 운명의 열차에서는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를 없앰과 동시에 칸바와 쇼마는 히마리와 링고에게 얽혀있는 인과를 없앨 수 있었다. 칸바는 자신을 희생하며 히마리의 소멸할 운명이라는 인과를 없앴고, 쇼마 역시 자신을 희생하며 링고의 주문의 대가로 소멸할 운명이라는 인과를 없앴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들이 서있는 운명의 열차에서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를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갑자기 칸바와 쇼마가 희생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두 개의 모자가 된 모모카가 히마리와 마리오를 선택하게 된 이유와 같을 것이다. 칸바와 쇼마는 희생을 통해 히마리와 링고의 인과를 없앰으로써 자신들의 부모가 일으켰던 사건에 대해 속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운명의 열차에서 타카쿠라 삼남매의 인과를 없앴기에 히마리와 링고의 죽음을 무로 돌리면서 그들을 구원하였고 이것이 타카쿠라 형제의 속죄인 것이다.



 결국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칸바가 쇼마에게 주었던 운명의 과실을 돌려주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었을까?


누군가가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게 우리에겐 필요했던 거야.


 위 대사는 모모카에게 구원받았던 케이주의 대사다. 버려진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다. 운명의 과실은 결국 사랑한다는 한마디의 말이었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펭귄드럼은 칸바가 쇼마에게 주었던 운명의 과실이다. 그리고 그 펭귄드럼을 쇼마는 칸바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본다면 <돌아가는 펭귄드럼>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는 것이다.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엔딩을 고려해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돌아가는 펭귄드럼>의 생존전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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