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1984>(1949) - 다채로운 표현이 끌리는 이유
미디어: 책
제목: 1984
지은이: 조지 오웰
옮긴이: 정희성
출판사: 민음사
출간연도: 2020 (1판 81쇄)
원문 출간연도: 1949
페이지: 452p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p75)
<1984>에서는 '신어'라는 용어가 나온다. 신어는 영어의 어휘와 문법에서 필요 없는 요소들을 과감히 없애 단순화 시킨 가상의 언어이다. 신어의 목적은 사고의 폭을 좁혀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당에게 반역할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신어는 너무 무서운 개념이어서 현대 사회에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단순히 단어의 폭을 좁히는 신어가 그렇게 무서운걸까? 그럼 반대로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단순한 표현보다 다채로운 표현에 더 끌리게 되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름다운 글귀나 다채로운 표현을 저장하여 오래 간직하기도 한다. 혹은 그런 표현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이는 스위스의 심리학자 카를 융의 개성화 이론에 나오는 개인무의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개인무의식은 자신이 겪은 경험들과 관련된 잠재적인 심리이며, 쉽게 말해 잊혀진 기억이나 경험 등을 말한다. 더 자세하게는 억압된 욕구, 내가 인정하지 않는 부정적인 측면, 혹은 사회적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 등의 요소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기억과 경험에 초점을 맞추겠다. 카를 융은 개인의 잊혀진 기억들을 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개성을 찾아가는 여행이며, 개성을 찾는 것은 곧 자아실현의 발판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먼지로 뒤덮인 경험들을 잘 털어내고 닦아주어 나의 특별한 경험으로 만드는게 자아실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채롭게 표현된 특별한 경험이나 문장에 끌리나 보다.
<1984>에서도 이와 같은 개인의 특별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당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증거를 부인하라고 강요했다.
...
하지만 그가 믿고 있는 것이 옳다! 당은 틀리고, 그는 옳다.
...
이 세계는 굳건히 존재하며, 세계의 법칙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돌은 단단하고, 물은 축축하며, 허공에 던져진 물체는 지구의 중심부를 향해 낙하한다.
...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이다. (p114)
당은 모두에게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부인하라고 한다. 하지만 윈스턴은 자신의 기억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며, 윈스턴이 보았던 세계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말할 수 있는 것(둘 더하기 둘은 넷)이 곧 자유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기억이 맞는다면서 우겨댈줄 도 아는 것 같았다.
...
그러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에게만 있다. (p120)
윈스턴은 자신의 기억이 맞다고 우겨댈 줄 아는 노동자들이 희망이라고 한다. 즉, 경험을 말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자유의 상징이며, 자유는 곧 희망이 되는 것이다. 자유가 인간의 상징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1984>와 카를 융의 개성화 이론이 말하고자 하는게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개인 경험은 '나는 인간이다'의 중요한 발판이라는 점이다.
<1984>에서는 신어와 함께 '이중사고'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중사고는 서로 다른 주장이 있을 때 당이 옳다고 말하는 게 곧 진실이라고 생각을 덮어 씌우는 방법이다. 신어를 통해 사고의 폭을 좁히고, 좁혀진 사고의 폭으로 이중사고를 실현하는 것이 당의 목표이다. 예컨대, 내가 가지고 있는 단어의 수보다 경험한 것들이 많다면 비둘기집 원리에 의해 같은 단어로 표현이 되는, 다시 말해 구분이 되지 않는 사건들이 생긴다. 비둘기집 원리는 비둘기집보다 비둘기 수가 많을 경우 반드시 한 집에는 비둘기가 2마리 이상 있다는 원리이다. 이처럼, 신어로 단어의 개수를 제한해두면 자연스레 사고능력이 제한되고, 사고능력이 제한되면 이중사고를 쉽게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윈스턴이 자신의 경험을 이중사고로 없애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중사고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준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구별해 낼 수가 없었다. 급하게 걸어가는 십여 명 중에 그녀가 끼어 있을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뚱뚱하고 뻣뻣해진 몸을 이제는 더 이상 뒤에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p411)
먼저, 윈스턴은 자신의 연인 줄리아를 잊어버렸다. 다른 사람들과 줄리아가 더 이상 다른 단어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 가족과의 옛 추억을 잊었고, 총살형을 통해 자유를 얻는 상상조차도 잊어버린다. 자신의 경험을 다 잊어버린 윈스턴은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당을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 윈스턴도 결국 당의 일원들과 같은 사람이 된다. 이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이중사고가 얼마나 충격적이고 무서운 것인지 알게 해준다. 그리고 바로 뒤에 나오는 신어의 원리는 더 큰 충격을 준다. '맞다. 이중사고가 신어로부터 나오는거지?'. 괜히 부록으로 신어의 원리를 실은게 아닌 거 같았다. 심지어 신어의 원리가 치밀하게 적혀있어 위압감은 두 배로 온다. 조지 오웰은 미친게 분명하다.
<1984>에서 나온 '신어가 사고를 제한한다'라는 명제는 전통적인 견해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견해에서도 통하는 것 같다. 전통적인 견해로는 '사피어-워프 가설'이 있다. 이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가설인데, 현대에 와서는 힘을 많이 잃은 듯하다. 대신 현대적인 견해로 언어와 사고가 상호작용한다는 관점이 있다. <언어본능>의 저자이자 언어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내재되어 있는 정신어가 있고, 정신어를 자신이 속한 사회 언어로 변화시켜 의사소통한다. 여기서 정신어는 기초 지식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할 것이다. 이 기초 지식은 언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에 있는 것이다. 마이클 토마셀로의 <언어의 기원>에서도 초기 인류는 언어 없이도 인간의 생각을 이끌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언어 없이 표현되는 기초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이 기초 지식을 사회에서 정한 언어로 소통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기초 지식을 표현한 언어가 결국은 복잡한 지식의 중요한 도구가 됨으로써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현대의 견해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기초 지식을 언어로 표현하여 소통한다는 것이다. 만약, 언어가 신어처럼 제한 되어 있다면 역시 비둘기집 원리에 의해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서로 다른 기초 지식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표현되지 않은 기초 지식으로 인해 복잡한 사고에 영향을 주는 악순환이 된다. 결국 신어는 사고를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 <기생충> 한 줄 평이 떠오른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처음 들었을 때는 '뭐 이렇게 어렵게 표현해? 그냥 재밌으면 재밌다고 하면 안되나?'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이 생각이 틀렸다고 느꼈지만, 왜 틀렸는지는 사실 잘 몰랐다. 이동진 평론가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에 맞고 말의 맛이 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조금 틀리게 표현하면 안되나 싶으면서 혹시 단순히 전문가라서 정확하게 표현해야 했나 생각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전문가라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하는 것은 맞았다. 다만 거기에 깔린 의도를 알지 못했다. <1984>에서 나온 신어가 전문가들이 정확하게 표현해야만 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일깨워 주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