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밸리의 경제학
창업은 대개 아주 작은 단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그것을 스타트업이라 부른다. 그리고 스타트업의 성장 과정에서 투자는 거의 필연적인 요소처럼 여겨진다. 많은 창업가들이 가능하다면 투자를 받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는 외부 자금이 필요한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고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초기 창업기업에 정말 많은 자금이 필요할까? 의외로 답은 단순하다. 꼭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초기 단계에서 지나치게 여유 있는 자금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다.
초기 창업기업은 생각보다 작은 금액으로도 제품이나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다. 아직 시장 검증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자금을 확보하면, 인재를 채용하고 제품 개발에 더 많은 돈을 넣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원을 투입하면, 방향을 잘못 잡은 상태로 더 빨리 달리는 결과가 되기 쉽다.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확인이다. 투자자들 역시 작은 MVP의 성과만으로도 시장의 반응을 충분히 읽어낸다. 시드투자를 받기 위한 제품 테스트는 생각보다 적은 자금으로도 가능한 경우가 많다.
에어비앤비의 시작은 이를 잘 보여준다. 창업자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집세를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컨퍼런스 기간 호텔이 모두 만실이 되자 자신의 아파트에 에어매트리스를 깔고 손님을 받았다. 비용은 거의 들지 않았지만, 이 작은 실험으로 “낯선 사람의 집에 돈을 내고 머무를 의향이 있는가”라는 핵심 가설을 검증했다.
토스 역시 초기에는 거창한 금융 플랫폼이 아니라, 공인인증서 없이 계좌번호만으로 송금할 수 있다는 하나의 가치에 집중했다. 큰 자금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작은 실험과 분명한 질문이었다.
초기 창업기업에 투자할 만한 자금 창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액셀러레이터, 정부 지원 프로그램, 엔젤투자, 시드 펀드 등 초기 자금을 공급하는 경로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하지만 창구가 많다는 것과 실제 투자 유치가 쉽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벤처캐피탈협회의 2023년 벤처투자 동향에 따르면, 연간 약 7만 개의 신규 법인이 설립되지만 그중 벤처투자를 받는 기업은 약 4,000개 수준이다. 비율로 따지면 약 5.7%다. 투자 유치 자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다. 투자를 받았다고 해서 생존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투자받은 기업 가운데 성공적인 엑시트, 즉 IPO나 M&A로 이어지는 비율은 높지 않다. 투자 유치는 출발점일 뿐, 성공의 증거는 아니다.
기업이 투자금을 많이 받으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소진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유는 자금을 경쟁우위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것이 VRIO 관점이다. VRIO는 자원이 가치 있는지, 희소한지, 모방하기 어려운지, 그리고 조직적으로 활용 가능한지를 보는 틀이다. 그런데 초기 스타트업이 투자금으로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의 상당수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사무실을 얻고, 직원을 채용하고, 광고를 집행하는 일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경쟁우위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돈이 있으면 이런 범용적인 일에 자금을 쓰기 쉬워진다는 점이다. 좋은 사무실, 경력 있는 인력, 대규모 마케팅은 모두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핵심 가설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곳에 자금을 쓰면, 결국 runway, 즉 자금이 바닥날 때까지의 시간만 빠르게 줄어들 뿐이다.
역설적이지만, 돈이 없을 때 오히려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선택의 여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사무실이 없으면 집이나 카페에서 일하게 되고, 직원을 뽑을 돈이 없으면 창업자가 직접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광고를 집행할 돈이 없으면 제품 자체로 반응을 확인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본질에 집중하게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객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범용적인 일에 자금을 쓰기보다, 우리만 할 수 있는 독보적인 일에 runway를 집중해야 한다. 범용적인 일은 나중에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핵심 가설을 검증하고 경쟁우위의 단서를 만드는 일은 초기에 하지 않으면 늦어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이펙추에이션 이론의 ‘감당 가능한 손실(Affordable Loss)’ 원칙은 꽤 시사적이다. 사라스 서라스바시는 성공한 기업가들이 “얼마를 벌 수 있는가”보다 “얼마를 잃어도 괜찮은가”를 먼저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초기 단계에서 큰 투자를 받는 것은 감당 가능한 손실의 범위를 쉽게 넘어설 수 있다. 투자금이 커질수록 기대도 커지고, 빠른 성장 압박도 함께 커진다. 실패했을 때 잃는 것도 많아진다. 반대로 적은 자금으로 시작하면 실험의 규모도 작아지고, 실패의 비용도 통제할 수 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 남는다.
스타트업이 가장 많이 멈추는 구간을 흔히 데스밸리라고 부른다. 초기 투자를 받아 제품을 만들었지만, 시장 검증에 실패하거나 다음 투자를 유치하지 못한 채 자금이 바닥나는 시점이다.
데스밸리를 건너는 방법은 아주 거창하지 않다. 적게 쓰고, 빠르게 배우는 것이다. 물론 무조건 아끼라는 뜻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배움이 없는 곳에 돈을 쓰지 말라는 뜻에 가깝다.
사무실을 얻는 것에서 지금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경력 좋은 직원을 뽑는 것에서 어떤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가? 광고를 집행하는 것이 현재 단계에서 어떤 학습으로 이어지는가? 만약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할 때가 아닐 수 있다.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돈으로 어떤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가? 이 실험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만약 이 가설이 틀렸다면, 다음에는 무엇을 시도할 것인가? 초기 자금은 성장의 연료이기 전에, 학습의 재료여야 한다.
초기 창업기업에 많은 자금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은 생각보다 자주 과장된다. 오히려 적은 돈으로 시작하는 편이 본질에 더 가까이 가게 만들고, 감당 가능한 손실 범위 안에서 더 많은 실험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투자는 도구일 뿐이다. 목적이 아니다. 투자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성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돈으로 무엇을 배우고, 어떤 가설을 검증하며, 어떤 경쟁우위를 만들어내느냐다.
그래서 창업 초기에 더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일지 모른다. 지금 세우고 있는 가설은 감당 가능한 손실의 범위 안에 있는가? 지금 쓰려는 그 돈은 범용적인 일에 들어가는가, 아니면 우리만의 답을 찾기 위한 실험에 들어가는가?
그 답은 runway가 바닥나기 전에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