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국어교사 김지씨 Jan 11. 2024

'문화적 외상'으로서 입시 체험

김지씨의 대학원 레포트 (5) - 제프리 알렉산더의 문화적 외상 개념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집단의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서 그들의 기억에 영원히 자국을 남기고, 돌이킬 수 없는 근본적인 방식으로 자신들 미래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끔찍한 사건을 당했다고 여겨질 때, 문화적 외상은 발생한다. 여기에서 전개할 문화적 외상은 무엇보다도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개념으로서 이전에는 관련이 없었던 사건, 구조, 인식과 행위 간에 새로운 의미심장한 인과 관계를 제시한다. 이 새로운 과학적 개념은 사회적 책임과 정치적 행위라는 떠오르는 영역을 조명하기도 한다. 문화적 외상을 구성함으로써 사회 집단, 민족, 심지어 때로는 전체의 문명도 인간 고통의 존재와 근원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고통에 대한 상당한 책임감을 ‘수용한다.’     

(제프리 C. 알렉산더, 『사회적 삶의 의미』, 한울아카데미, pp.197~198.)


앞서 ‘성년의례’로서 입시를 경험한 이들의 원체험이 왜곡된 형태로 자리잡게 된다는 점을 빅터 터너의 개념을 빌려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왜곡된 원체험을 제프리 알렉산더의 개념으로 설명한다면 일종의 ‘문화적 외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집단의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미래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끔찍한 사건’이라는 표현은 한국 사회에서 10대를 보낸 젊은 세대들의 입장에서는 ‘입시’라고 바꿔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입시를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들은 지금까지의 제도적 문제점을 개선하고, 좀 더 공정한 선발 과정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제프리 알렉산더의 관점에서 본다면 ‘입시’ 문제는 단순히 제도적 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재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전반적으로 겪고 있는 ‘문화적 외상’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 입시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어설프게 입시를 건드리는 경우에는 입시 기사의 댓글 창에 달린 엄청난 댓글들이 보여주듯이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가까운 신경질적인 반응만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이라는 담론이 한 나라의 대통령을 탄핵시킬 정도의 압도적인 힘을 가지게 된 데에는 문화적 외상으로서 입시 체험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1등부터 꼴찌까지 모두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경쟁을 지속해온 경험들은 자신의 입지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상황을 절대로 참지 못하며, 이는 타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적대감으로 연결된다. 한순간의 사소한 선택으로 인해, 주변의 다른 이들에 비해 뒤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순간순간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관용과 환대의 정신이 깃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노력을 들여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사회적 지위를 부모의 권력을 기반으로 수월하게 획득한 사례들은 그 무엇보다 공동체의 선을 해치는 절대악으로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앞선 문재인 정부에서 공론장 형성과 정치적 공공성 확보를 위해 ‘정책숙려제’를 추진, 실시한 바가 있다. 그때 이 입시 문제도 공론장에서 다루어진 바 있다. 그런데 합리성을 표방한 공론장에서 나온 결정들은 여전히 수능 중심의 입시를 통한 학생 선발이라는 큰 틀의 정책을 전반적으로 건드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퇴보한 결정이 도출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몇몇 교육단체에서는 정부가 시민들의 뒤에 숨는다는 비판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이 공론장 형성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사실 교육문제에 있어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앞서 클리포드 기어츠에게서 그러했듯이,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중첩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실 정책숙려제가 열어 놓은 공론장에 참여한 이들의 경우 공론장 형성 과정에서 이런 중첩을 제대로 이해하고 접근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볼 지점은 그 공론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내면에 입시와 관련된 어떤 문화적 외상이 자리잡고 있는지이다. 만약 제프리 알렉산더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공론장에 참여한 그들에게 입시가 어떤 체험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심층적으로 살펴보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숙려는 진정한 숙려가 아니라고 강변하지 않았을까?    

작가의 이전글 대중성이라는 미명 뒤에 숨은 센델 논변의 비루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