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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어교사 김지씨 Jan 11. 2024

경쟁이라는 '습관'을 길러주는 교육

김지씨의 대학원 레포트 (6) -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 6-8장 읽기 

마이클 센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의 6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존 롤스의 시각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맥락에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무지의 장막’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소득과 기회의 분배를 임의적 요소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자유지상주의에 근거한 이른바 ‘능력주의(meritocracy)’ 맹신에 일종의 경종을 울려주고 있는 듯하다. ‘능력주의 시스템이 사회적 우연의 영향을 완전히 제거한다 해도,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 부와 소득의 배분이 결정되는 상황은 여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능력주의 사회를 실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롤스는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는 ‘능력주의’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등장시킨 마이클 영의 책에서도 비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가상역사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는 같은 이름의 책에서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가 극대화된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대가족을 만들려는 엘리트 집단 성원들이 입양 협회를 찾는 통상적인 수요가 몇 배로 늘었다. 그런데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암시장 유아 거래가 무질서하게 늘어났다. 때로는 왕실에 맞먹는 지참금을 줘가며 엘리트 가정의 머리 나쁜 아이를 내보고 하층 계급의 똑똑한 아이를 교환한다. 필사적인 부모들은 지능 계보로 볼 때 유망한 하층 계급의 임신부를 면밀히 지켜보다가 출산하면 아이를 유괴하기도 한다.     

(마이클 영, 유강은 역, 『능력주의, 2034년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엘리트 계급의 세습 이야기』, 이매진, p.289)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태아 때부터 지능검사로 개인의 지적 능력을 판별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서, 엘리트 계급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입양하거나 심지어 납치하는 사건들이 발생한다는 설정은 능력주의가 극대화된 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롤스는 공동체가 이와 같은 디스토피아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능력 또한 우연의 영역에 속한 것임을 명확히 한 뒤 평등의 관점에서 분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철학적 입장이 실제로 적용될 때 어떤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는지를 살피기 위해 센델은 7장에서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이라는, 현재 미국에서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논의의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다. 특히 7장에서는 대학을 입학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살펴보면서, 과연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이 역차별이 아닌가라는 사회적 반론에 대해 철학적 성찰을 진행한다. 


센델은 대학 입학 허가라는 문제를 단순히 미덕, 예를 들어 학생 개인의 탁월한 지적 능력, 꾸준한 노력 등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대학의 사명에 기여하는 역량에 맞는 학생에 대한 자격 부여의 개념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학생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가는 대학의 존재 목적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통해 센델은 정의에 있어서 ‘목적’을 강조하는 8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로 자연스럽게 진입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문제가 제기된 맥락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던 것은 대학 입학이라는 문제가 이렇게 사회적으로 중요한 논제가 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가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아마도 한국이나 미국과 같이 어떤 대학을 어떻게 졸업했는지가 개인의 삶에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만 진지하게 논의될 문제가 아닐까 한다. 물론 한정된 재화를 공동체 전체에 어떻게 분배하는 것이 옳은지를 따지기 위한 예시로서 대학 입학의 문제가 제시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대학 입학이라는 문제가 미국에서 이렇게 문제가 되며, 한국에서는 정치적 이슈가 될 정도로 민감한 문제가 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는 사회적 정의의 측면에서 옳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해서 대학 입학의 문제는 교육적 이상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고등 교육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충분히 제공하면 해결될 일이다. 교육 분야에 투자할 예산이 그렇게 많이 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단적으로 과거에 도서관 확충과 관련된 예산문제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산업 분야에 비해 교육 분야에 지원되는 예산은 그리 큰 것이 아니다. – 물론 20년 전 자료이기는 하지만 고속도로 1km를 닦는 정도의 예산으로도 충분한 장서와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춘 도서관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입학 자격 문제가 이렇게 민감한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교육의 목적이 ‘경쟁을 통한 우수한 인재의 선발’이라는 정의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한 인간을 위한 성장의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여전히 경쟁을 통한 학생의 선발이라는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꾸준히 축적되어 온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근대 시기 개화기부터 경쟁에서 도태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회진화론’의 세례를 체감하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실감해 온 한국인들의 정서 속에서 ‘경쟁 논리’는 필수불가결한 생존의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경쟁 논리의 기반한 공정 담론은 오늘날 능력주의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는데, 이 능력주의는 불평등의 문제를 불공정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한국의 능력주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박권일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대학 입학 자격 문제, 즉 입시 문제는 ‘꼭대기에 서기만 하면 상상 이상의 특권과 면책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는 ‘특권의 자격자를 선별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박권일, 『한국의 능력주의』, 이데아, p.93.) 따라서 이런 시험은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와 같은 교육 경험들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다는 점인데, 시험의 역사를 살펴본 이경숙은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되는 생애의 교육과정이 하나 있다면 단연코 시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시험 이야기’들이 공통적인 체험으로서 사회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강조한다.(이경숙, 『시험국민의 탄생』, 푸른역사, p.15~17.)


여기에 대한 개인적 체험 한 가지가 인상적으로 떠오른다. 2021학년도 2학기에 2학년 문학 수업을 진행하면서, 김남천의 소설 「무자리」를 다루었다. 이 소설은 가난하고 무능한 가족의 틀을 벗어나, 기생이 된 누나의 지원을 바탕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고자 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을 통해 1930년대에도 조선인들을 사로잡고 있던 ‘상급학교 진학 시험’이라는 사회적 관문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몰락한 누이의 처지를 알게 된 뒤에 광산노동자로 살아가려 하는 주인공 소년의 마지막 선택이 가지는 의미를 다뤄보고자 했다. 


수업 자체는 의미 있게 잘 진행되었지만 – 수업 평가를 받아본 결과, ‘석차(席次)’라는 말이 사회진화론이 팽배하던 근대화 초기 일본 철학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게이오 대학’의 전신) 학생들을 성적에 따라 순서대로 앉혔던 행위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에 학생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결국에는 교육적 모순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 소설이 시험 범위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런 의미 있는 교육적 경험들이 기말고사 문제라는 형태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인용된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시험문제에서 다루는 내용은 입시를 거부한 인물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 찾기였지만, 오히려 학생들은 시험문제를 푸는 행위를 통해 결과적으로 시험을 통한 경쟁 체제에 순응하는 체험을 내재화한 것이다. 


센델이 8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이와 같은 개인적인 체험에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하며, 권리를 정의하려면 해당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telos)’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과연 내가 진행했던 수업의 주된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그 수업은 적절한 목적에 도달하였을까? 오히려 학생들에게 경쟁 체제의 공고함을 알려주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라는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의식으로 그치는 지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의 목적이 과연 경쟁, 선발에 있을까?’라는 질문은 이제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가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던 부분은 ‘습관’과 ‘실천적 지혜’의 연관성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가 좋은 삶의 필수 요소라고 언급한 뒤에 ‘폴리스의 법은 우리의 좋은 습관을 심어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선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의 이성적이고 진실한 상태’인 ‘실천적 지혜’를 이루기 위해서는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옳은 행위를 함으로써 옳게 되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게 되며, 용감한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하게 된다. 

이것은 여러 국가에서 되어지고 있는 일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입법자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좋은 습관을 가지게끔 함으로써 좋은 국민을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입법자들이 바라는 바이다. 이 일을 잘하지 못하는 입법자들은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만다. 이 점에서 좋은 국가 체제와 좋지 못한 국가 체제가 갈라진다. (…)   

그러므로 한마디로 말하여, 성품은 각기 거기 대응하는 활동에서 생긴다. 그래서 우리가 전개하는 활동은 일정한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성품이 활동들 간의 차이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어떠한 습관을 가지는가 하는 것은 결코 사소한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요, 아주 큰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아니, 모든 차이가 거기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 최명관 역, 『니코마코스 윤리학』, 서광사, 1984, p.62~63.)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적 관점에 따르면 내 수업은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학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는 결국 입시라는 거대한 경쟁 체제 안에 포섭되고 말 것이라는 교육적 체험을 습관적으로 반복시킨 것이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괜히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 어쩌면 더 나쁜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억울한 점도 있기는 하다. 이런 상황을 거의 백여년에 가깝게 지속하고 있는 이 광기 어린 망령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국가 체제가 바로 좋지 못한 체제가 아닐까하는 억울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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