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씨의 수업일기 (2)
김지씨는 고 3 전담 국어교사이다. 담당과목은 '독서'지만, 한국에서 고 3 담당 수업을 한다는 것은 '수능 연계'라는 엄청난 후광을 등에 업고 교실을 지배하고 있는 'EBS 수능특강'과 힘겨운 씨름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어과목 수능특강은 크게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김지씨는 또 하필이면 '독서'를 맡았다. 여기서 '독서'를 맡았다는 것은 교육과정에 충실하게 독서 교과를 가르치거나, 학생들과 열심히 책읽기를 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수능 출제 영역 중 거의 괴물로 진화해버린 이른바 '비문학' 영역 수능 준비를 해야한다는 끔찍한 시지프스의 형벌에 당첨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코로나때문에 올해 3,4월은 이걸 온라인으로 진행해야했기에 김지씨는 더욱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시지프스가 그러했듯이, 어차피 다시 1년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올 무지막지한 돌덩이이기는 하지만 김지씨는 어쨌든 낑낑거리고 산을 올라가야 하지않겠느냐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야 월급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수능이라는 관문을 무슨 일이 있어도(지진이 나도, 코로나가 창궐해도) 통과해야 하는 눈앞의 고3 학생들은 또 어쩔 것이냐 말이다. 결국 5년째 반복하고 있는 그 험준한 수능특강의 산을, 김지씨는 입시라는 부담을 안고 또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할 때마다 매번 비슷한 경험을 하지만, 수능특강 '독서'는 책장을 넘겨 주제를 쭈욱 훑어보기만 해도 김지씨의 기를 확 꺾어 버리는 묘한 재주가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선과 악의 개념', '생태통합양식', '칼 융의 집단무의식', '비용-편익 분석', '장소의 획일성' 등등 넓이와 깊이 측면에서 압도적인 주제들이 펼쳐놓은 화려한 입시의 향연에 김지씨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불청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사실 이 '비문학'이라는 개념은 앞서 '이른바'라는 덧말을 붙였듯이, 학술적으로 규정된 용어라고 말하기 어렵다. 수능 출제 영역 중에서 문학이 아닌 분야를 통상적으로 지칭했던 것이 굳어져서 이런 식으로 통념적 용어가 되어 버린 듯하다. 올해 김지씨가 참여하고 있는 학회(우리말교육현장학회)에서 이 '이른바' 비문학 영역에 대한 학술발표회를 진행했는데, 이 영역 명칭때문에 발표회 제목을 정할 때부터 고민이 많았었다. 함께 참여하신 연구위원 선생님들도 명칭을 정하는데 난색을 표하셨고, '수능 내용영역 텍스트', '읽기 평가 지문' 등의 용어들이 제시되었지만, 이 또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영역 명칭의 난맥상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차원에서 '이른바 비문학 읽기라는 난제'라는 제목으로 결국 결정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학술발표회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하자면, 어쩌다보니 김지씨는 이 자리에서 '사회'라는 걸맞지 않은 중책을 맡게 되었다. 사회를 맡다보니 발표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꽤 꼼꼼하게 들어볼 수 있었다. 학술적 연구가 가진 중요한 장점을 들어 본다면, 체험적으로 느끼던 막연한 사실들을 명료하게 정의할 수 있는 적확한 개념들을, 결정적인 근거들과 함께 논리적으로 전달해준다는 점이 아니던가. 그래서 김지씨는 그날 그 자리에서 비문학 영역에 대해 느끼던 문제의식들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개념들과 근거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김지씨에게 특히 강한 인상을 주었던 것은 20년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수능이라는 시험 자체가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비문학 영역 또한 진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는 연구였다. 진화의 방향이 옳은 방향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특히 요즘은 수능 영어 과목이 절대평가화되면서, '변별력'이라는 강력한 환경적 요인이 비문학 지문을 일종의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처럼 변모시켜버렸다는 거다. 하나의 지문에 80개가 넘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 제시문이 과연 학생들의 독서능력을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는 자료인가라는 문제제기를 들으면서 '괴물'이라는 표현이 어쩌면 과장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라고... 김지씨는 생각했다.
이렇게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비문학 영역을 앞에 놓고 매일매일을 씨름해야 하는 김지씨의 마음은 또 어떠하겠는가 말이다. 오늘도 '칸트의 선천적 종합판단'과 '틴들의 빛의 산란효과'를 꾸역꾸역 설명하는 김지씨의 마음은 그야말로 너덜너덜 누더기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고전하는 나날들 중에서, 그나마 김지씨가 힘을 모아 반격한 사례가 몇 개 있기는 한데, 그 중에 인상적인 한 가지 경험을 이 자리에서 한 번 풀어보려고 한다.
김지씨는 처음 온라인으로 수능특강 수업을 준비할 때, 그냥 EBS 특강을 링크해서 걸기만 하는 것이 약간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든 좀 학생들에게 더 들이대보고 싶다는 욕망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시문과 관련된 추가 자료도 첨부해주고, 학습 과제도 약간 창의적으로 학생들의 마음 속에 넣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이것이 지나친 학습 부담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수능특강 제시문들을 조금 꼼꼼하게 탐구해보았는데, 제시문을 읽다가 김지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것은 '생태통합양식'과 관련된 제시문의 일부였는데, '잡는 어업'에서 '양식 어업'으로 변화되는 어업의 양상을 설명하면서, 양식 어업 발달과정에서 공유자원이라 할 수 있는 연안의 어장이 황폐화되는 부작용이 발생하므로, 여러 종류의 생물들을 동시에 양식하면서 노폐물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생태통합양식'의 발전 과정과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글이었다.
그런데 김지씨의 마음을 껄쩍지근하게 만들었던 부분은 이 연안 어장의 황폐화를 설명할 때 '공유 자원의 비극'이라는 개념을 들먹인 것이었다. <보기>까지 동원하면서 이 개념을 설명하고 문제도 냈는데, 정답 또한 '공유 자원의 비극은 공동의 자원을 이기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한다'였다. 비뚤어진 심성의 소유자인 김지씨가 보았을 때, 이런 식으로 제시문과 문제를 마무리짓게 되면 이 문제를 풀고 난 학생들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유자원의 비극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공유자원의 비극'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좀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김지씨는 대학에서 경제학의 기본 교재로 배운다는 '맨큐의 경제학'을 찾아보았다. 거기서 '공유자원'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본 것이다. 그랬더니 공유자원, 공공재(이 두 개념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또한 비문학 제시문 중 하나에 잘 나와있다.)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장에서 살펴본 문제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배경이 있다. 모든 경우에서 재산권(property rights)이 명확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시장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가치 있는 재화의 법적인 소유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예를 들어 누구도 맑은 공기와 국가 안보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지만, 거기에 가격을 부과하여 이득을 취할 권리가 있는 사람 역시 없다. 공장이 오염물질을 과다하게 배출하는 것은 그 배출물에 대해 아무도 요금을 부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이 국방 서비스를 공급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사업자도 국가안보로 이득을 보는 사람에게 요금을 받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N. Gregory Mankiw, <맨큐의 경제학 - 7th Edition>, 2015, p.270)
물론 김지씨가 경제학 전공자도 아니고 해서 정확하게 이해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읽은 바에 따르면, 공유자원 문제는 재산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영역의 문제이니, 공유자원을 사적소유의 영역으로 적절하게 전환하면 해결된다는 식으로 김지씨는 이해했다. 아니, 진짜 그런가??? 그래서 약간 의심이 들어서 또 이것저것 찾아보았는데, 이 문제를 정반대로 접근한 사례가 있었다. 이 책은 역사적으로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개념이 원천적으로 발생한 원인부터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스위스야말로 이러한 경우에 딱 들어맞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유리, 슈비츠, 아펜젤, 글라루스, 운터발덴 이렇게 다섯 개의 공화국은 각자의 땅을 분할되지 않는 소유지로 가지고 있으면서 민회에서 관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주에서는 촌락 공동체가 폭넓은 자치권을 소유하고 있어서 연방 영토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알프스 목초지의 3분의 2 그리고 스위스 삼림의 3분의 2는 지금도 공유지로 되어 있고 상당수의 전답과 과수원, 포도밭, 토탄지(土炭地), 채석장 등도 공동으로 소유되고 있다. 선출된 공의회의 심의에 모든 세대주가 여전히 참여하고 있는 보Vaud에서는 공유 정신이 특히 강하게 살아 있다.
(P.A.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중 "근대인의 상호부조". p.279)
이 글은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인클로저'와 같은 토지 독점으로 인해 공동체 사회가 붕괴되었을 뿐, 그 이전 공동체 사회에서는 '공유자원의 비극'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스위스와 같은 곳에서는 과거 공동체 윤리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도 '공유자원'을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사례들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더 찾아보니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이 공유자원의 문제를 접근하여 노벨상까지 탄 사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엘리너 오스트롬의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였다. 그래서 김지씨는 - 수능특강과 달리 EBS의 긍정적인 측면을 담당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인 - 지식채널e에서 엘리너 오스트롬의 주장이 정리되어 있는 에피소드를 발견해서 온라인 클래스에 그 영상을 공유해서 걸어두었다. 그리고 엘리너 오스트롬의 견해를 비판한 또 다른 책도 눈에 들어와 참고로 읽어두었다. 도시의 공공성 문제를 다루는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라는 책에서 엘리너 오스트롬의 해결방법이 국가 이상의 큰 공동체에서는 쉽게 실현되기 힘든 방안이라고 비판한 것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수업 내용을 위의 흐름대로 구성하고, 김지씨는 학생들에게 관련 자료를 읽어보게 하였다. 그리고 네이버폼을 활용하여 학생들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써보라는 과제도 내주었다. 김지씨는 오프라인에서 자주 발견하는, 수업에 지친 학생들의 눈빛을 떠올리며 과제에 대해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제출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학생들 상당 수가 답변을 보내주었고, 그 중에서는 꽤 길게 논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탁월한 답변을 보내준 학생들도 꽤나 있었다. 여기서 그 답변들을 모두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오프라인으로 수업을 할 때보다 꽤 구체적이고 다양한 의견을 표현한 학생들이 많아서 놀랍기는 했다. 이게 온라인 수업의 장점인가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의외의 결과에 들뜬 김지씨는 처음에 이 답변들에 대해 각각 피드백을 해주어야겠다는 야심찬 마음을 먹었지만,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그것이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볍게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숙제를 내줬으니 답은 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전체적인 감상을 담은 해설 영상을 찍어 올려두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
이렇게 중구난방 좌충우돌 한 편의 수업을 마치고 나서, 김지씨는 비문학 수업도 꽤 재밌는데... 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경제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겠다는 느낌이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나 이런 생각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이 수업은 수능특강이 제시하고 있는 약 50여편의 글 중에서 두 번째 글을 다룬 수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이런 글이 거의 50편이 더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래서 김지씨는 또 질려버리고 말았다. 시지프스 앞에 기다리고 있는 산은 동네 산책용 언덕이 아니었으며, 최소한 개마고원 쯤은 되는 꽤 험한 산임을 김지씨는 다시 한 번 씁쓸하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