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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어교사 김지씨 Aug 05. 2020

이상했던 어떤 담임 선생님 이야기

김지씨의 수업 일기 (4)

그야말로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옛날 이야기 하나. 김지씨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즉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김지씨는 아직도 고등학교 입시가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빡세게 연합고사를 보고 비평준 지역에서 나름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한 케이스였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도 입시가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 학교에는 김지씨보다 훠얼씬 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러다보니 지금으로 따지면 번아웃이 왔다고나 할까? 공부 의욕도 별로 없고, 그리 머리도 좋지 않아서 1학년 성적이 급전직하하는 상황이 되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학교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것이 정상일 텐데, 김지씨는 이상하게도 학교 가는 것만은 상당히 재밌게 느꼈다. 지옥같은 경쟁이 펼쳐지는 학교에서 낙오자에 가까운 학생이었지만, 힘들어도 학교가서 노는 게 재밌다고 느꼈던 좀 특이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김지씨가 이런 학생이 된 데에는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영향도 좀 있었던 것 같다. 


이 1학년 담임 선생님은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좀 이상한 선생님이었다. 일단 과목이 '기술'이었다. 그래서 과목도 입시와는 큰 연관이 없었다. 키도 크고 살벌하게 생겨서 반 학생들에게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당시 학교 테니스장의 황태자로 군림했던 체육선생님과 테니스로 맞장을 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생님이셨다. 기교파 체육선생님을 강력한 스매싱으로 응징했던 파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살벌한 선생님이 반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무지막지한 선생님은 아니었다. 시험 보기 전에 지친 아이들에게 하모니카를 불어주시기도 하고, 토요일에 도시락을 싸와서 다 같이 밥을 비벼먹는다거나, 여름방학에 반 학생 전체를 데리고 가서 해수욕장에서 놀기도 했다. 


특히 다른 반에는 그냥 형식적으로 있었던 학생회 조직을 진짜 자치적으로 구성하게 하셨다. 그냥 이름만 있었던 학습부, 미화부, 새마을부(이 전근대적 이름봐라... 학급 청소를 담당했던 부서였다) 등등의 부서 대신에, 김지씨네 반 친구들은 학급 회의를 거쳐 기기묘묘한 부서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홍보부'는 학급의 홍보를 담당했는데, 주된 목적은 여자고등학교에 우리반을 널리 알려, 펜팔 및 미팅을 적극적으로 주선하는 부서였다. 그리고 제일 웃긴 것은 '놀 부'였다. 말 그대로 학급 전체가 놀아야 할 자리에 앞장 서서 노는 자리를 알차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야말로 '놀' 부서였다. 김지씨는... 예상대로 '놀 부' 출신이었다...^^;;


이 '놀 부'가 힘을 발휘한 것은 가을 소풍이었다. 학급 회의를 거쳐 소풍 기획을 짜고, 기획에 따라 2주 전부터 댄스 연습을 하면서 반 학생들 앞에서 공연 준비를 했다. 김지씨는 무려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를 준비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은 소풍 당일이었다. 앞장서서 한참 산을 오르던 선생님들께서 갑자기 내려오시면서, 무슨 쌍팔년도 개그같은 말을 학생들에게 남겼다. '이 산 아니다. 그냥 다 집에 가라' 다른 반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김지씨네 반 학생들은 울상이 되었다. 한참 제대로 놀아볼라고 갖은 준비를 다해왔는데, 그냥 집에 가라니... 억울한 마음에 반 학생 전부가 집에 안 가고 남아서 개울가에 모여 준비한 공연판을 진행했다.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즐기고 계시던 선생님들도 김지씨네 반 아이들이 노는 꼴이 재밌으셨는지 오셔서 함께 어울리셨다. 멋쟁이 영어 선생님께서 흥겨움 반 취기 반으로 불려 주셨던 '골목길'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이 이상한 담임 선생님의 이상한 행적의 최고봉은 바로 '학생 상담'이었다. 어떤 일에도 감정의 변화가 없을 것 같은 경상도 출신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들을 방과후에 남겨 상담을 하는데, 입시 상담이 아니라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김지씨가 교사가 되고 난 뒤에야 이 프로그램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뭐 이런 걸 왜 하지?'라는 의심 반, 체념 반으로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불을 꺼 놓고 친구와 함께 손을 잡고 한참의 시간을 보낸 뒤에 자신의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김지씨는 당시 별명이 축구선수 '고정운'이었던,(축구를 좀 아는 분들은 이 친구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얼굴 시꺼먼 친구와 한참 손을 잡고 이야기하다가 둘 다 울먹울먹해졌던 기억이 난다. 


이랬던 이 선생님의 책장에는 - 이것도 김지씨가 사범대로 진학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는데 - '우리교육'과 같은 잡지가 꽂혀있었다. 나름대로 눈치 빠른 김지씨는 고 1 당시에도 이 선생님이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학교 현장을 한바탕 폭풍처럼 뒤흔들어 놓았던 '전, 교, 조'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지씨와 그 친구들은 이 선생님이야말로 교장, 교감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학생들 조져서 성적내고, 위에다가 아부하고 해야 교장, 교감하는 거라고 아주 막연하게 추측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지씨네 반 아이들이 그 난장판을 벌이고 있을 때, 담임 선생님이 장, 감 선생님이나 학부모들로부터 여러 가지로 압박을 받으셨으리라는 것도 교사가 된 후에 김지씨는 너무나 잘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선생님의 당시 고초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튼 김지씨가 나중에 사범대학에 진학하고, 그리고 교사가 되고 나서 가끔 들리는 소문에 이 희한한 선생님은 자기의 길을 계속 가시고 계신 것 같았다. 한결같이 살벌한 얼굴로, 한결같이 열심히 살고 계신 듯 했다. 여름방학 물놀이 때 데려왔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모습 그대로 사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페이스북에서 이 선생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로 페친을 맺고, 최근의 사시는 모습을 김지씨는 살펴보았다. 아니...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교장 선생님'이 되셨단다. 한 혁신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되셔서, 지금도 학생들을 바라보며 멋있게 살고 계셨다. 김지씨는 약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이 그래도 조금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안도감도 들었고, 김지씨 주변에는 참 좋은 분들이 많았다는 고마움도 느끼게 되었다. 어쨌거나 선생님의 반가운 소식을 접하면서 김지씨도 세상에 좌절하지말고, 조금 더 믿으면서 자기 길을 가야겠다는 희망을 발견한 듯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은 멀리서 교장 선생님이 되신 그 희한한 선생님께 보내는 축하의 마음임을 김지씨는 꼭 전하고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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