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 단팥 인생 이야기(あん),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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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를 자꾸 찾게 된다. 옷깃을 뚫고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 바람 탓일 테다. 겨울의 끝을 알리는 따스한 봄바람이나, 혹은 청량한 여름의 감성을 오롯이 품은 일본 영화들은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주곤 한다. 일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언급하게 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일본 영화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를테면 <바닷마을 다이어리>,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러브 레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등의 이름들이 떠오른다. 거기에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찾을 만한 몇 가지의 이름들을 더 기억한다. 하지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일본의 영화들을 찾다 보면, 생각보다 볼만한 작품이 몇 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본의 영화계가 불황인 까닭도 있을테지만, 사실은 우리가 아는 작품들의 결이 일본 영화계 전체에 있어서는 굉장히 드문 경우라는 반증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감독들의 작품이다. 내수용 영화들을 살펴보면, 사실 그 면면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애니메이션이 견인하는 일본 문화계에서 그것들을 다시 실사화시키는 작업이 대다수이고, 혹은 입꼬리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일본 스타일의 코미디 영화, 혹은 추리극, 스릴러, 형사물 등등을 배제하면 정말 볼 것이 없다. 한 국가의 영화계를 이야기할 때 대다수의 수를 차지하는 작품의 결을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빛나는 몇 가지의 작품의 결을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일본 극장가에 실제로 걸리는 작품들은 으레 그렇다.
오히려 유효한 작업물을 찾자면 드라마에 있을 테다. 조금씩 한국에도 소개되어지다가, 넷플릭스를 필두로 하여 점점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일본의 드라마는 <심야식당>이나 <고독한 미식가>처럼 소화하기 어렵지 않은 작품들이 많다. 어쨌든, 일본 내부에서도 아직 세계 무대에서 유효한, 이를테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챙겨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국의 영화 산업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들은 오히려 한국의 영화 산업을 부러워하곤 한다. 비교적 적은 국민의 수인데도 불구하고 천만 관객을 심심치 않게 동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가 그들에게 소개할 정도로 충분한 작품성을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해서는 또 할말이 많지만, 일단은 각설하고. 영화가 한참 발전하던 시기 한국과는 비교와도 되지 않게 먼저 유럽에 이름을 알렸던 옛날의 기라성과도 같은 작품과 감독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일본 영화계는 어쩌다 이런 파국을 맞이하게 된걸까.
그러니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쩌면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일본 영화들은 사실 일본 영화계에서 마이너한 측에 속하는데, 그렇다면 '일본 영화'로 이것들을 묶어서 파악하는게 올바른 접근일까. 오히려 감독으로 파악하는게 맞을 테다. 단적인 예로 소노 시온은 한 인터뷰에서 일본 영화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자기는 일본 감독이 아니고 일본 영화계에 속하는 것조차 불만스럽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을 일본 영화로 분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와세 나오미는 어쩌면 조금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 영화에 기대하는 그 따뜻한 감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녀의 이름을 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막연하게 일본의 감성을 떠올렸을 때 흐릿하고, 조용하고,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그녀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그녀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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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호불호가 상당히 갈릴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굳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따뜻하다 못해 녹아버릴 지경이다. 대부분의 영화는 핵심을 이끌어나가는 갈등과, 그것을 풀어내는 기승전결을 가지고 있다. 스릴러 장르 따위에서는 이걸 어떻게 더 변칙적으로, 그러나 완벽하게 풀어나가는지가 영화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기승전결과 갈등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곤 한다. 그런 시도는 여러 목적을 가지고 이용되는데, 같은 일본 영화인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예를 들자면 여기에서는 뚜렷한 갈등 없이 바닷가 마을에서 살아가는 자매의 생활상을 따뜻하게 조명하는 것으로 영화의 모든 시간을 사용한다. 그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보는 것은 마치 바닷물이 쓸려오고 다시 쓸려가는 바닷가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특별한 갈등이 오히려 이야기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비슷한 맥락이지만, 조금 더 강화된 방향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있어 기본적인 맥락과 연결부를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생략해버리고,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들을 아주 깊고 길게 보여준다. 이를테면 영화의 주요한 소재인 도라야키 안에 들어가는 팥소, 앙꼬를 만드는 장면은 마치 요리 방송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단계를 따라가며 조명하지만, 가장 핵심 인물인 도쿠에는 드디어 가게에 취직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가게를 떠나버린다. 으레 다른 영화라면 그녀가 가게에 취직하고 나서 벌이는 여러 행적 따위를 집중하는 것으로 영화를 풀어나가고자 했을 테다. 집중하고자 하는 어떤 사건에 있어서는 집요하게 관찰하지만, 영화가 매끄럽게 흘러나가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식의 배짱 영업이다.
하루에도 몇 편씩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정도 영화의 기승전결을 파악하면 지금쯤 러닝타임이 몇 분을 흘러가고 있을지 예측하기 쉬워진다. 등장인물들과 세계관의 소개가 얼추 끝난 걸 보니 20분 정도 지났겠군. 첫 번째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걸 보니 40분 쯤 지났겠군. 하는 식의 예측은 거의 반절 이상은 맞아들어가는 편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좀처럼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 예를 들면 타란티노나 핀처의 영화처럼 이야기에 너무 몰입하게 되서 지나고 보니 벌써 영화가 끝나 있네, 하는 식으로 흡인력이 좋은 건 아니다. 오히려 비유하자면 영화에서 팥을 고아낼 때처럼, 마치 냄비 앞에서 모든 잡념을 버리고 음식이 눌지 않도록 천천히 국자를 휘젓는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기분이다. 러닝타임 내내 시간이 녹아내리듯 뭉근히 흘러가는, 무언가 특별한 사건이 진행된 것도 아닌데 벌써 영화가 끝나가는, 그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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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특징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평점이 크게 갈릴 것이다. 조용히 낮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를 몇 시간이고 지켜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종류의 관객이라면 아마도 이 영화가 취향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인풋과 아웃풋이 확실한, 인과 관계가 명확한 걸 좋아한다면 이 영화를 중간에 꺼버릴 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 영화가 훌륭한 영화인가 묻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영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야기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묻는다면 사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의미도 없는 씬의 나열은 아닐 테다. 마치 떠다니는 구름에 대해 선문답을 하는 것처럼, 무언가 좀 더 본질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대해 얘기하는 듯 하는 느낌 정도는 받을 수 있으나,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영화라기보다는 그러므로 미술 작품을 보는 기분이다. 그림을 보는 것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천차만별로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파악했을 때 명확한 내러티브가 없는 어떤 순간들의 합을 보고 개인의 감성과 결합하며,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나의 역사와 결합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영화가 좋다고 쓴 적이 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 영화는 특별히 나의 대답을 바라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 나만의 답을 내놓아도 조용히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